가소롭구나,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이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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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28면

누가 알까? 가장 철학적인 고양이 한 마리가 맥주에 취해 물독에 빠져 비범한 삶을 마쳤다는 사실을. 위대한 철학자들보다 더 냉철했던 고양이 선생은 속속들이 인간을 탐구하는 도중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도대체 인간들은 왜 술을 마시는지, 그는 정말로 알고 싶었다. 그러니 몸소 술을 마실 수밖에. 그러다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물독에 빠져 세상만사에 작별을 고한 것이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 <21> 조롱

인간보다 더 인간을 이해했던 고양이가 죽은 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인간들 중 가장 고양이에 가까운 인간 한 명이 고양이의 비범한 삶과 도저한 사유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이렇게 탄생한 소설이 1907년 완간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다.
거리를 두어야 어떤 것이든 제대로 음미될 수 있는 법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직시하기 힘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우리에겐 고양이의 철학적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고양이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단순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울 때는 죽어라 하고 운다. 게다가 일기 같은 쓰잘머리 없는 것은 절대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자신의 속내를 풀어놓아야 하겠지만, 우리 고양이 족은 먹고 자고 싸는 생활 자체가 그대로 일기이니 굳이 그렇게 성가신 일을 해 가면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존해야 할 것까지는 없다. 일기를 쓸 시간이 있으면 툇마루에서 잠이나 즐길 일이다.(…) 나는 얌전히 앉아 세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재미있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이면서, 재미있지도 않은 일에 웃고 시답잖은 일에 기뻐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인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성품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평소 말수가 적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 얘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같잖게 느껴졌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은 너무나 위선적이고 복잡하다. 고양이가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니, 혹은 겉과 속이 괴리돼 있으니 인간은 일기와 같은 글을 쓴다. 진솔한 글을 통해 순간적이나마 겉과 속을 일치시키려는 발버둥인 셈이다. 아! 그렇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과 문화란 어쩌면 이렇게 겉과 속의 불일치 상태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종횡으로 엮이며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여기에 고양이, 다시 말해 소세키의 탁월함이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에 대한 신랄한 조롱도 이 정도면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이 이 문장을 높이 평가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교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교에서 『역경』을 존경하고, 선불교에서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자니 답답하니까 멋대로 의미를 갖다 붙이고는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고양이의 냉소적인 웃음, 혹은 소세키의 허허로운 웃음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웃음이란 반응은 조롱이라는 감정을 토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롱이란 감정이 어떤 내적 논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더 깊이 음미하기 위해 스피노자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자.

“조롱(irrisio)이란 우리가 경멸하는 것이 우리가 미워하는 사물 안에 있다고 생각할 때 발생하는 기쁨이다.”(스피노자, 『에티카』 중)

조롱은 묘한 감정이다. 미움과 기쁨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소세키=고양이’는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가장 경멸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겉과 속이 일치하는 고양이 족을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폄하한다. 얼마나 인간은 가증스러운 존재인가?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반면에 고양이의 장점을 단점이라고 단정하니 말이다. 그만큼 소세키는 자신도 한 마리의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간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에서 겉과 속의 불일치를 간파한 다음, 고양이(소세키)는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제 당당히 인간을 조롱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이 풍기는 유머 감각의 씁쓸함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양이와 가깝다고 해도 소세키는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결국 인간에 대한 고양이의 조롱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조롱일 수밖에 없다. 이런 냉소적인 자기 조롱은 얼마나 허무하고 자기 파괴적인가? 고양이가 물독에 빠져 죽은 것이나, 소세키가 고질적인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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