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텃밭 덕에 이웃사촌 얻었어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서울 서초구 반포본동 (주공)아파트 주민들이 16일 아파트 관리사무소 옥상 텃밭에서 직접 가꾼 고추를 수확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형수 기자]

지난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본동 (주공)아파트의 관리사무소 옥상은 초록 빛으로 가득했다. 주민들이 만든 496㎡의 텃밭에서 고추 820여 그루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다 주민들에게 나눠줄 고추입니다.” 텃밭 한구석에서 수확한 고추를 비닐봉지에 나눠 담던 주민 김형문(66)씨가 방금 딴 고추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한 봉지에 20개씩 넣었다. 아파트 주민 4000여 세대에 골고루 나눠줄 계획이다. 지난 7월에도 1500여 세대가 고추 맛을 봤다.

 이 아파트에 텃밭이 생긴 것은 지난 4월이다. 지난해 여름 아파트 재건축 결정을 놓고 주민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며 틈이 벌어진 것이 계기가 됐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인 조기연(65)씨는 “40년 가까이 같은 곳에서 살아온 사람끼리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긴 게 참 안타까웠다”며 “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생각에 텃밭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텃밭 조성은 쉽지 않았다. 조 대표는 “어떤 묘목을 사야 할지, 어떤 흙을 배합할지 등을 잘 몰라 책과 인터넷을 통해 많이 공부했다”고 소개했다. 서초구에 요청해 지원금 500만원도 받았다.

 한 달을 뛰어다니며 텃밭을 만들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텃밭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낮시간에 70~80대 노인 서너 명이 잠깐 둘러보다 갈 뿐이었다.

 6월에 들어서자 주민 반응이 달라졌다. 텃밭에서 첫 수확한 상추와 가지 등을 집집마다 나눠준 게 효과를 봤다. 부재중인 가정도 맛볼 수 있도록 현관문 고리에 걸어뒀다. 주민들은 “우리 아파트에서 이런 게 나오느냐”며 신기해했다. 조 대표는 “한 집이라도 더 나눠 주느라 정작 우리는 맛도 못 봤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텃밭에 나오는 주민들이 부쩍 늘었다. 카메라를 들고 아이와 함께 나오는 30~40대가 많아졌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들과 일주일에 2~3회씩 텃밭을 찾는다는 서명원(39)씨는 “예전엔 아이들에게 자연을 접하게 하려고 주말에 교외까지 나가야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며 만족해했다.

 텃밭을 함께 가꾸는 주민이 요즘 100여 명으로 늘었다. 김준부(71)씨는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텃밭 작물로 시작해 자녀·경제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완전히 시골사람 다 된 것 같다”며 웃었다. 고추를 모두 수확하면 텃밭에 배추를 심을 계획이다.

 반포본동아파트는 현재 재건축 계획을 추진 중이다. 조 대표는 “신축될 아파트에도 반드시 텃밭을 조성해달라고 업체 측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텃밭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서다.

 서울시의회는 지난달 조경시설에 ‘텃밭’을 추가하는 내용의 조례를 통과시켰다. 현재 주택법상 조경시설은 아파트 대지 면적의 30% 이상이 되어야 한다. 서울시 여장권 주택정책과장은 “비싼 조경수를 구입하기보다 텃밭을 만드는 게 경제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텃밭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성운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