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건설 왜 이렇게 됐나]

중앙일보

입력

55년 역사의 동아건설[00280]이 9일 법원의 회사정리절차 폐지 결정으로 사실상 파산절차를 밟게 됐다.

그러나 법원의 이번 결정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대수로 사업부문은 공사를 마칠때까지 별도 법인으로 운용될 전망이다.. 중동특수가 한창이던 80년대에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독점 수주하면서 현대건설[00720]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업체로 부상했던 동아건설이 몰락의 길을 걷게된 것은 무리한 사업확장에 따른 과다차입 때문이라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등 해외토목, 플랜트 공사에 주력해 온 동아건설은 국내 아파트 건설 특수에 휩쓸려 90년대부터 무분별한 차입으로 국내에서 민간 건축공사와아파트 건설분야로 사업을 급격하게 확대했다.

그러나 97년말 예기치 않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동아건설은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서 과다한 용지매입과 재건축.재개발 아파트 사업에 투자된 대여금의 회수가 이뤄진데다 아파트 미수금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98년 6월 채권단은 9천600억원의 협조융자를 마무리하면서 최원석회장의 퇴진을 요구했고 최 회장도 이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동아건설은 98년 9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1호기업으로 지정됐고 고병우 전 회장이 사령탑을 맡아 기업 회생에 주력했다. 고 전 회장은 99년 2월 동아건설의 부채 802억원을 출자전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채권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고 전 회장은 특히 동아건설의 인천 매립지를 정부에 1조원에 매각, 회사를 회생시키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99년 4월 6천355억원을 받고 처분하는데 그쳤다.

워크아웃 과정도 순탄하지 못했다. 최원석 전 회장이 회사에 잔존하고 있는 `자기사람'을 통해 여러차례 복귀를 시도했고 고 전 회장은 노조와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나가지 못했다.

여기에 국내외 건설경기 부진이 겹치면서 결국 고 전 회장은 작년 6월 퇴진하게된다. 1개월뒤 최동섭 전 회장이 취임했지만 여건은 호전되지 못했고 작년 9월 채권단에 3천409억원의 신규자금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채권단의 반응은 싸늘했다. 채권단은 결국 작년 10월 30일 워크아웃 중단 결정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당시 워크아웃 중단의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그중 42개 기관으로 이뤄진 채권단이 입장 차이를 조율하지 못한 채 워크아웃을 결정한데다 이후 동아건설쪽에서도 내부 분열로 채권단의 신뢰를 끌어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주채권 은행인 서울은행[02860]은 담보를 많이 확보해 동아건설에 대한 워크아웃이 중단되더라도 채권 회수에 유리한 입장이었던 반면 외환은행[04940]은 무담보채권이 많아 워크아웃을 지속할 것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채권단 내부의 의견 조율이 힘들었고 이런 채권단 내부 사정은 동아건설에 대한 과감한 지원을 원천적으로 어렵게 했다.

또 워크아웃 결정 당시 숨겨졌던 부실 자산규모도 워크아웃이 진행되면서 2조원대로 불어난 점과 채권단이 워크아웃 기업으로 선정해 놓고도 회생을 위한 지원에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도 워크아웃 중단결정의 큰 변수로 작용했다.

고병우 전 회장의 정치자금 제공 파문이 확산되면서 작년 상반기 내내 계속됐던동아건설 내분은 결과적으로 채권단의 불신을 초래했다.

동아건설은 97년말 21개에 달했던 계열사중 13개사를 매각하거나 청산, 합병했고 인천 매립지와 부동산, 유가증권 등 자산을 매각했다. 또 97년말 6천500여명이었던 직원수를 작년말 현재 4천여명으로 감축하는 자구노력도 단행했다.

동아건설은 특히 지난달 6일 삼일회계법인이 `청산이 바람직하다'는 실사결과를내놓자, 분식결산 사실을 스스로 밝혀 재조사를 유도한데 이어 리비아 대수로 사업과 해외 토목사업외에 나머지를 정리하고 법정관리를 인가해 달라는 최후 안까지 내놨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정리절차 폐지결정은 채권단에 이어 법원도 동아건설을 믿지 못한데 따른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인교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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