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씨 '도덕경 해석의 정통성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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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웃긴 남자'의 저자 이경숙씨가 본지에 글을 보내자신의 노자해석에 대한 관점을 체계적으로 밝혔다.

이씨는 이 글에서 도올 김용옥에 대한 비판의 차원을 넘어 2천5백년 도덕경 해석사을 새로 정립하려는 원력(願力) 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말 나의 책 '노자를 웃긴 남자'가 나간 뒤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나의 해석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도덕경이란 책에는 2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와 주석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도 잘 안다.

때문에 과연 2천년이 넘는 역사와 도올 김용옥씨를 포함한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가 쌓인 결과로서의 학설이 하루아침에 부정되고 뒤집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과,과연 무명의 가정주부가 그럴 만한 근거와 학문적 토대를 제시하고 있느냐 하는 반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도덕경이란 책의 특수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수많은 고전 중에 아마 도덕경만큼 다양한 주석과 해설이 존재하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첫째,도덕경은 그 저자가 자기 글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없고 그 해설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두 째,글을 극도로 압축해서 쓴다는 점인데 이것은 한자라는 문자의 구조적 불완전성과 함께 의미의 모호성을 증가시켰다.

셋째는 저자가 직접 만들어서 쓴 창작 단어들이 많다는 점이다.그래서 어떤 단어의 용례를 같은 시기의 다른 책에서 찾기 어려운 것이 많다는 점이다.

네 째 역설과 반어법을 많이 쓰기 때문에 논리적인 연결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섯 째 어순을 바꿔놓는 글쓰기 방식이 자주 노출되는데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번역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문장으로서의 결함이 있는 반면에 그것이 가져올 해독의 난해함을 고려한 저자의 배려가 곳곳에 숨어있는 책이기도 하다.

즉 읽는 이가 그 의미를 유추해서 파악할 수 있는 단초와 힌트를 책의 전체에 걸쳐 암호처럼 넣어 놓은 점이다.

그래서 부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몇 번이고 읽어서 앞과 뒤를 연결해서 생각해야만 뜻을 알 수 있도록 지극히 교묘한 장치를 해 놓은 글이다.

따라서 도덕경은 내가 책에서도 강조했듯이 문장 하나 하나를 떼어놓고 읽었을 때는 올바른 번역이 불가능하다.때문에 도덕경은 5천 글자 전체가 문장으로 치면 하나이다.

한 개의 문장으로 된 책이다.따라서 이 책에 대한 독해에는 ‘전체를 한꺼번에 다 읽거나 다 안 읽거나’ 이거나 혹은 ‘전체의 뜻을 정확하게 알거나 아니면 전체를 잘못 알거나’하는 둘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장은 바르게 읽고 어떤 장은 틀리게 읽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틀린 경우에는 반드시 앞과 뒤가 안 맞게 되어 있고 올바르게 읽었을 때에만 비로소 전체의 의미가 일관되게 통하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2천년이 넘는 세월과 그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날까지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많은 학자들이 한 주석들이 다 틀릴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세간의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그리고 도덕경이 유별나게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 책이 전국시대말(戰國時代末) 에 정립되기 시작한 황노학(黃老學) 의 경전이 되면서 의도적으로 신비적인 색채가 가미되고 그것이 더욱 강화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실제의 원전 내용보다도 그 해석이 더 심오해지고 고매하게 발전해 온 것이다.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조차 불가능한 경지에 대한 그럴듯한 묘사로 원전을 풀이하려는 경향이 대단히 농후했다고 나는 본다.

때문에 도덕경은 ‘원전의 뜻’과 ‘해석된 의미’가 하늘과 땅 처럼 갈라진 묘한 고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경전보다 그것에서 나온 신학이 더욱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것은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지만 도덕경은 아예 이해 불가능한 신비서(神秘書) 가 되어 버린 드문 예이다.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은 기존의 모든 주석과 해석들을 다 접어두고 오로지 원전만을 놓고 내린 해석의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도올 김용옥이고 그 누구고는 안중에 없다. 때문에 가장 원전의 의미에 가까운 번역이 가능했던 것이다.

고전이나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정통성은 바로 ‘원전’에 있다는 보편적인 사실의 확인에 그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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