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스 꼴 안 당하려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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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호 02면

2009년 1월,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완치된 줄 알았던 암세포가 간으로 번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식 수술이 시급했다. 서둘러 캘리포니아주 간이식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계산상 수술은 6월에나 가능했다. 의사들은 잡스가 4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발을 굴렀지만 별수 없었다. 미국장기기증센터 규정에 따르면 잡스 같은 암환자보다 간경변증이나 간염 환자의 순위가 앞이었다. 잡스가 아무리 애플컴퓨터와 아이폰 등으로 인류의 삶을 바꿔놓은 영웅이고, 전 세계 최고 부자라도 소용없었다. ‘하나뿐인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평등하다’는 미국장기기증센터의 기준 앞에서 잡스는 평범한 월급쟁이와 다를 게 없었다. 애가 탔지만 잡스와 가족들은 인내하며 기다렸다. 결론적으로 잡스는 그해 3월 말에 간이식 수술을 받고 생명을 건졌다. 법적으로 중복 등록이 가능하다는 데 착안해 테네시주에도 등록한 것이다.

김종혁의 세상탐사

교통사고로 죽은 남자의 간이 기증됐을 때 1순위였던 잡스는 전용기 편으로 곧바로 테네시주로 날아가 이식수술을 받았다. 간이식은 시간과의 싸움이니 잡스처럼 전용기가 없다면 중복 등록은 하나마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도 ‘가진 자의 특혜’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그 정도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 당시 부통령이던 딕 체니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강경파다. 하원의원으로 5선을 했고, 국방장관과 부통령을 지냈다. 한때 워싱턴 정가에선 미국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건 부시가 아니라 체니라는 소문이 있었다. 공화당엔 그의 추종자도 적지 않다. 체니는 지난 3월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20개월을 기다렸다고 한다. 체니는 71세의 고령이어서 기다리다 죽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룰을 지켰다.

하나만 더 사례를 들자. 미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리처드 아미티지. 레슬링 선수를 방불케 하는 커다란 체구에 머리까지 빡빡 민 그는 베트남 참전 용사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퇴각할 때 마지막까지 남아 난민들과 함께 탈출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의 주인공이다. 공화당 우파인 그는 북한과 중국·러시아 등에 대해 강경하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고아들을 입양해 키운다. 친자식 두 명을 포함해 8명이다. 아미티지가 국무부 차관보일 때 나는 워싱턴 특파원이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이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워싱턴에 오면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욕을 많이 했다. 아미티지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미티지가 전 세계 고아들을 입양해 키운다는 얘길 듣고 나면 “사람은 괜찮은가 보지?” 하며 대부분 말꼬리를 내렸다. 덕을 베푸는 사람은 욕설도 비켜가게 된다는 걸 그때 절감했다.

요즘 그리스 사태를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았을 때 한국민은 나랏빚을 갚으려고 결혼반지, 돌반지까지 들고 나왔다. 그래서 국가부도를 불과 1년여 만에 극복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리스를 손가락질하면서 그때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진다면 과연 한국민은 그때처럼 헌신적인 모습을 보일까? 쉽게 답하기 어렵다. 안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부자와 권력층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심상치 않은 걸 종종 느낀다. 삼성이 수조억원의 순이익을 냈다고 발표해도, 현대차가 수출로 대박을 냈다고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게 나와 뭔 상관이냐, 지들만 좋지.” 대부분 그렇게 말한다. 정치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인은 모두 자기 이익만 챙기는 존재라는 정서가 팽배하다. 국가나 기업이나 가정이나 좋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97년의 위기처럼 국민들이 단결하면 이겨낼 수 있다. 진짜 위기는 그걸 못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스가 지금 그걸 보여주고 있다. 그런 꼴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는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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