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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지혜 필요한 훈민정음 제2 해례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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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송의호
사회1부 기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존의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가치가 더 높을 수 있는 고서를 피고인은 낱장으로 분리해 은닉하고 그 행방을 함구하고 있다. 피고인을 징역 10년에 처한다.”

 지난 9일 대구지법 상주지원은 훈민정음 제2 해례본(상주본)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배익기(49)씨에게 10년형을 선고했다. 상주본은 이번 재판을 거치면서도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법정 공방만 형사와 민사에 이어 다시 형사로 벌써 3년7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지루한 재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날 방청석에는 상주본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또 한 명이 나타났다. 안동 광흥사의 주지 스님이다.

 지난번에 진행된 민사소송과 달리 검찰은 이번 재판에서 1999년 광흥사 불복장(佛腹藏) 유물을 턴 서모(51)씨를 유력한 증인으로 채택했다. 서씨가 당시 나한전을 털 때 나한상 배 속에 해례본도 들어 있었으며 그걸 상주 골동품상에 넘겼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법원은 서씨의 증언을 받아들였다. 재판대로라면 해례본의 원 소유권은 상주 골동품상에서 졸지에 광흥사로 넘어간 것이다. 대법원이 지난해 9월 배익기씨와 상주 골동품상 조모(67)씨의 소유권 다툼에서 조씨의 손을 들어준 판결과는 다른 내용이다.

 광흥사 주지 범종 스님은 “재판을 지켜본 뒤 소송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한번의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학계는 해례본이 불복장 유물일 가능성에 대해 “거의 없다”고들 말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불교와는 무관한 기록물인 점, 광흥사 복장 유물과 연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불상의 배 속 좁은 공간에는 책 형태보다 낱장으로 경전 등이 통상 들어간다는 이유다. 무죄를 주장하는 배씨도 항소할 뜻을 내비쳤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단순한 문화재 차원을 넘는다. 문화재위원들이 “가격을 산정할 수 없지만 굳이 매긴다면 1조원 이상”이라고 감정할 정도의 무한가치를 가졌다. 그런 상주본이 낱장으로 뜯긴 채 어디에 어떤 상태로 놓여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실물은 없는 채 재판을 거치면서 불복장 유물이 되기도 하고, 훔친 물건이 되기도 하는 불명예도 덧씌워지고 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훼손될 가능성에 해외로 밀반출될 위험성도 커진다. 훈민정음의 ‘굴욕’이다.

 학계는 배씨가 진품을 내놓기 어렵다면 연구를 위해 복사본이라도 공개하는 것이 최소한의 국민이 된 도리라고 강조한다. 재판부도 해례본부터 살려놓고 보는 솔로몬의 지혜를 짜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