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사회보다 공정사회가 먼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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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 키워드는 일자리 창출과 공정성 회복이었다. 위에서 아래까지 같은 원칙을 적용하고,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해서는 엄정히 대처하겠다고 했다. 조세 혜택도 일자리와 이익을 해외로 빼가는 기업들보다 미국 내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에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보다 1년 반 앞선 2010년 8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가 떠오른다. “공정한 사회 원칙이 확고히 준수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 대통령이 천명한 뒤 우리 사회는 온통 공정사회 이야기로 들끓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쉽지 않은 학술서가 대중적 베스트셀러가 되는가 하면, 정부 부처마다 공정사회를 지향하는 정책들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좌고우면하느라 눈치 보던 이들까지 너도나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러나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을 정착시키겠다는 정부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거래관행을 위한 기본적 제도 개선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자리에 복지논쟁이 들어섰다. 어느덧 대한민국은 보편적 복지, 공공선, 공동체, 평등주의 구현 같은 주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특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2040세대와 소셜미디어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복지논쟁은 1% 부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 공방으로 옮겨 갔다. 여당까지 앞다퉈 부자세 도입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새해 바로 전날 최고세율을 38%로 높이는 소득세 개정안이 전격 통과되기도 했다. 임진년의 양대 선거를 앞두고 표심을 의식한 여당은 부자과세와 복지 확대에 앞장서고 있다. 야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와 재벌 해체를 외친다.

국민이 원하는 진정한 복지사회 구현은 교육수준에 걸맞은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다. ‘대기업은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도 곤란하지만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재벌 해체가 일자리 문제에 무슨 도움이 될지 궁금하다. 1% 부자에게서 세금을 더 걷는 것으로 복지사회 재원이 얼마나 충분히 마련될지도 미지수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오히려 공정하게 경쟁하고 성실히 세금을 내는 부자들이 살고 싶은 나라가 돼야 한다. 낮은 세율과 부패지수의 나라 싱가포르는 부자가 이민 가고 싶어 하는 국가 1위다. 싱가포르는 금융·교육 등 서비스업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으나, 최근 생산력 높은 부자들이 투자를 늘리면서 제조업까지 발전하고 있다. 좋은 일자리가 늘고 실업률은 완전고용에 가깝게 내려갔다.

우리 정부가 20여 년간 부르짖어 온 서비스산업 육성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금융·의료·교육·관광 등의 선진화가 대졸자를 위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지름길임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정부가 새로운 산업정책을 시도할 때마다 국민은 의심의 눈길을 보내 왔다. 반세기의 압축 경제성장 과정에서 정부는 자원과 기회를 소수 대기업에 편중 배분해 준 기억을 남겼다. 특혜를 받고 성장한 수출 대기업이 성공의 과실을 대부분 가져갔다는 피해의식이다. 소외계층은 대기업으로 상징되는 부자계층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경쟁을 통한 부의 축적이 가능한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공정사회 논의는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과, 법과 원칙의 공정한 적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정부는 대기업의 시장지배력 남용을 통제하는 감독자 역할을 강화하고, 사회 구석구석의 유전무죄 풍토를 불식시켜야 한다. 수출 대기업은 시장의 경쟁규칙을 잘 지키고 중소기업이 지속적으로 기술 개발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이윤을 보장해 줘야 한다. 정부와 수출 대기업의 상생협력 구호가 이번에는 제스처가 아니라는 것을 국민에게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공정사회는 해외시장에서 기술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정보기술(IT) 혁명으로 하나가 된 지구촌 시장에서 자본력과 가격경쟁력만으로는 지속 성장하기 어렵다. 원천기술을 확보한 선진 대기업들이 지식재산권을 강화해 나갈 것이 뻔하다. 우리 수출 대기업들의 기술경쟁력 제고는 첨단기술 중소업체와의 협업 없이는 불가능하다. 세계화를 위기가 아닌 일자리 창출 기회로 만들면서 공정경쟁의 신뢰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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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은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미국 코넬대·남가주대에서 경영학·세법학을 공부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규제개혁위원, 국민경제자문위원, 한국경영교육학회장 등을 지냈다.

김성은 경희대 경영대학 교수 글로벌리더스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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