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시작도 없고 하염없고 속절없는 목청 높여 귀 잡아당기지 않는, 그 경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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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호 27면

이탈리아 로마의 어떤 광장에서였다.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말을 건다. 내가 한국인임을 확인한 그가 엉터리 영어로 침을 튀기며 열을 올린다.
“우와, 한국 너무 너무 좋아해.” 그리고 이어지는 말인즉 자기가 수만 달러 하는 시계를 갖고 있는데 한국 사람이 너무 너무 좋아서 특별히 단돈 100달러에 팔겠단다. 참 귀여운, 엉터리 사기꾼이었다.

詩人의 음악 읽기 ‘갤런트’한 음악의 전형, 프랑시스 풀랑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탄 열차에서 전형적인 아리아인 인상의 중년 부부와 옆자리가 되었다. 나름 우호적인 국제 친선 대화를 나누는데 내 서툰 영어가 사고를 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한국 가요를 듣는데, 독일에 오니 어디서나 미국 팝송이 들리더라.” 한국이 잘났다는 뜻으로 했던 말이 전혀 아닌데 상대방은 대(大)도이칠란트를 깎아내리는 의미로 이해했던 것 같다. 점잖은 차림의 부부는 그 말 이후로 그 긴 시간 동안 전혀 나를 쳐다보지 않고 무시와 냉대로 일관했다. 그 불편함이라니….

신기하다. 짧은 여행 체험들일 뿐이지만 이탈리아 사람은 정말 이탈리아 같고 독일 사람은 영락없이 독일스럽다. 당연히 프랑스도 영국도 그렇게 느껴진다. 그들도 거칠다는 한국인, 내숭 떤다는 일본인, 의뭉스럽다는 중국인 식으로 일반화해 우리 아시아인을 구분할까. 어쨌거나 음악을 들을 때 그런 식의 무작스러운 일반화가 꽤 적용된다.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이 독일-오스트리아 계통이어서 머리 빠개지는 헤겔 문장 같은 악보가 만들어졌다고 여겨지고,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가 러시아 사람이라서 거창한 행진곡풍이 등장한다고 받아들인다. 프랑스적인 인상, 프랑스 음악은 어떤 걸까.

갤런트(gallant)하다, 혹은 갤런트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뭐랄까. 즐겁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할까. ‘들떠서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는’쯤으로 해석하는 게 좋겠다. 본래는 17세기에 유행한 음악 양식의 명칭이지만 바로 갤런트한 것에서 프랑스를 느끼곤 한다. 독일풍의 ‘질풍노도’와 상반되고 감정의 과다소비에 질색하는 특징이 있다. 갤런트한 사람은 그러니까 심각한 것조차 유쾌하게 낭창낭창 표현한다. 그 바람에 전율이 없다. 극한이, 무시무시함이, 끔찍함이 없다. 사랑도 삶도 질풍노도여야 직성이 풀리는 종자에게 갤런트풍은 그래서 좀 허망하다. 선택이 가능하다면 어떤 인생을 택하겠는가. 갤런트 스타일로? 질풍노도풍으로?

갤런트한 프랑스적 인상에서 한 전형으로 떠오르는 존재가 프랑시스 풀랑크(사진)다. 1963년 세상을 떠났으니 음악사적으로는 아주 요새 사람이다. 에릭 사티의 영향권 아래에 있고 장 콕토가 끌어모았다고 할 수 있는 이른바 프랑스 6인조의 일원이다. 프랑스 6인조란 한마디로 ‘독일로부터 벗어난’ 음악가들을 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에서 출발한 풀랑크는 프랑스 음악사에서 꽤 여러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요한 존재가 된다. 인기 있는 곡도 제법 많다. 20대에 작곡한 발레 모음곡 ‘암사슴’, 의외로 무겁고 진지한 오페라 ‘카르멜파 수녀들의 대화’ 등을 주요 곡으로 친다. ‘하프시코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전원 협주곡’이나 ‘오르간 협주곡’은 걸작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만년의 20년 동안엔 의도적으로 진지한 작곡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시절의 이런저런 가벼운 곡들도 ‘막간 음악’으로 꽤 사랑받는다.

하지만 풀랑크에 대한 내 관심은 다른 것에 있다. 많은 양의 그의 가곡과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 바순 등을 사용한 실내악 소품들이 있다. 일단 좋고 싫고의 판단을 벗어버리자. 그리고 우아함의 끝을 상상해본다. 절제된 감정, 그러나 섬세하고 세련된 표현, 아울러 품위와 기품. 그런데 그 곡들은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감정의 미로’다. 다르게 말해 있는 듯 없는 듯하다고 할까. 베토벤 작품 하나를 들으면 명치끝이 뻐근해지는 반면 풀랑크의 곡들은 그야말로 하염없고 속절없다. 어느 날 밤 나는 풀랑크의 가곡을 틀어놓고 라면을 끓여 먹다가 마지막 면발을 삼키면서 깨달았다. ‘아, 저런 것이 경지다!’ 그러니까 대단하게 시작해 마구 흔들어놓다가 장렬하게 끝나는, 이름하여 ‘명곡’이 음악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풀랑크의 노래와 소나타처럼 미미한 약동의 세계가 예술적 감흥의 어느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 때로는 고요히 빛나는 별 하나에서 우주의 운행이 느껴지는 것이다.

어느 곡이라도 좋다. ‘눈 오는 밤’ ‘사랑의 노래’ ‘명랑한 노래’도 좋고 풀랑크가 특히 애호한 엘뤼아르나 아폴리네르의 시에 붙인 곡도 좋다. 아, ‘그녀의 귀여운 얼굴’도 있고 ‘평범함’ ‘작은 목소리’도 있다. 가수들은 풀랑크의 곡을 나직하게 부른다. 목청을 높여 귀를 잡아당기려 하지 않는다. 우아함과 갤런트. 내 인생은 한번도 그런 경지에 도달해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우아함을 경멸했다. 지지고 볶는 것만이 삶인 줄 알았는데 웬일일까. 가끔 풀랑크의 노래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 프랑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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