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공포영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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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를 즐기는 행위를 누군가는 롤러 코스터를 타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단지 두려움과 역겨움을 경험하기 위해 관객은 돈을 지불한다. 가장 극단적인 이미지 소비 사회의 한 단면이 공포영화 체험에 담겨있다.

최근 한국 영화의 스크린에는 온통 공포가 뒤덮여 있고, 피가 넘쳐나고 있다. 관객들만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마치 살해될 순서를 기다리는 공포영화의 주인공들 마냥 줄줄이 개봉하고 있는 공포영화를 만든 신인 감독들 또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맨 나중에 개봉한다고 해서 그가 공포영화의 '마지막 생존자'는 아니다. 차라리 개봉 순서가 늦어질수록 더 심하게 난도질 당할 수 있다.

공포영화의 잔혹함이 영화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영화 바깥에서 무성하게 피어 오른다.〈가위〉에서 비디오 카메라에서 나와 사람을 죽이는 장면에서 떠오른 것은 그래서〈링〉이 아니라,〈스크림〉이었다. 웨스 크레이븐의〈스크림〉에서 리포터 게일을 따라 다니는 카메라맨은 영화〈할로윈〉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비추는 몰래 카메라를 보다가〈할로윈〉의 주인공 마냥 살해당한다.〈가위〉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주인공이 살해당하는 장면은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마치 영화감독을 살해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신인 영화감독들의 '좀비 되기'?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공포 영화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부분 신인 감독들이 만든 최근의 공포영화에서〈여고괴담〉이나〈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보여주었던 신선한 충격과 현실감 있는 극적 구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최근 공포 영화가 앞서의 영화들이 갖고 있는 미덕은 잊은 채 단지 두렵고 엽기적인 장면들의 연속만을 나열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혹 한국의 공포 영화는 신인 감독들을 살해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제작자들의 공포영화가 아닌가?

이런 문제가 사실상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문제에 대해 더 정밀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누군가 말해주어야만 할 일이다. 다만 공포 영화 애호가들, 혹은 공포영화는 싫어하지만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 아니면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문제만을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들은 공포 혹은 영화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프랑스의 영화 감독인 장 뤽 고다르는 모든 영화는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느와르는 범죄에 대한 사랑을, 갱스터는 총에 대한 사랑을 다룬 영화이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고다르는 자신의 영화와 누벨 바그 시절의 영화들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다룬 영화라고 말했다.

공포영화는 그렇다면 어떤 영화일까? 확실히 조지 로메르나 피터 잭슨 같은 사람은 피 혹은 시체에 대한 사랑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샤이닝〉에는 공포에 대한 큐브릭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매드니스〉와〈스크림〉에는 각각 '공포 영화'에 대한 존 카펜터와 웨스 크레이븐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의 공포 영화는 공포에 대한 사랑 없이 단지 '저주'와 '복수'만을 남발하고 있다. 가장 싫은 게 그런 거다. 사랑이 없으면서도 무언가를 만드는 것. 만드는 사람도 싫어했을 것 같아 보이는 영화들이 나오고 있다.

만약 공포 영화가 롤러 코스터를 타는 행위와 유사하다면, 애써 공포 영화를 보러 갈 이유가 있을까? 영화 애호가는 비록 두려움과 역겨움을 자아내는 공포 영화가 싫더라도 그것 또한 '영화'이기 때문에 보러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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