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IT산업 일본보다 앞서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며칠 전 도쿄(東京)에서 열린 IT벤처엑스포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참여업체 1백97개 중 한국이 30개나 되지 않은가. 한국의 인터넷 소프트웨어 관련업체들이 진을 치고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해외 전시회 치고 한국이 이처럼 폼잡는 일은 일찍이 없었는데 대관절 어찌된 일인가.

어느 일본인 관람자는 "늙은 일본은 이제 틀렸어. 이젠 젊은 한국의 시대야" 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전시회뿐 아니다. 최근 들어 일본을 찾는 한국의 젊은 벤처사업가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기술이전이나 구걸하는 종래의 타입과는 전혀 딴판이다.

일본 기업이 못하는 인터넷시장 개척을 자기네들이 해보이겠다고 큰소리다. 속실력이 어떤지는 차치하더라도 우선 그 당당함에 일본인들도 "어어, 이것봐라" 하는 분위기다.

물론 한국이 앞서 있다는 것은 아주 작은 분야다. 정보통신의 저변기술 전체로 치면 일본 근처에도 못간다. 그렇다 해도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 실력에 첨단산업의 일부에서나마 이처럼 일본에 큰소리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견스러운 것이다.

그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경제위기 효자설' 은 늘 나오는 이야기다.

죽기살기로 뉴비즈니스를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왕성한 모험정신이 십분 발휘됐다는 것이다.

일리 있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또다른 요인은 양국 정부의 정책 차이다. 정보통신분야에 관한 한 일본 정부보다 한국 정부가 분명히 잘했다.

돌이켜 보자. 1980년 전두환(全斗煥)정권 시절의 경제수석 김재익(金在益)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주도한 통신혁명이 아니었던들 지금의 인터넷 붐이 가능했겠는가.

그는 전화 한대 놓는 데 몇달이 걸리던 것을 하룻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모함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든든한 '백' 을 엎고 과거의 통신망을 송두리째 걷어내고 새로운 통신인프라를 구축했다.

전화설치만 편리해진 게 아니다. 곧이어 등장한 팩시밀리가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그 다음이 인터넷. 싼 통신료와 경쟁체제 도입으로 손색없는 정보고속도로의 기반을 만들어 놓았고, 이것이 20년이 지난 지금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경제위기를 맞아 벤처사업에 목숨을 건다 해도 지금의 인터넷 붐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인경제 일본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뒤졌다. 일본전신전화국(NTT)이라는 국영 독점체제를 계속하면서 변화를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뒤늦게 둘로 나눴다지만 동(東).서(西)로 쪼갰을 뿐 경쟁체제 구축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비싼 전화요금은 여전하고 ISDN 도입 역시 설치비용이 터무니없이 높아 일반화가 여태 신통치 않다.

이것이 인터넷시대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일본의 기업들은 하는 수 없이 휴대전화에 인터넷을 담는 이동인터넷 등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성공과 실패가 한.일간의 통신분야처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원래 정부정책이란 잘하면 잘한 대로, 잘못하면 잘못한 대로 그 효과는 두고두고 간다. 한번 기본을 잘 닦아 놓으면 그 다음은 민간기업이 알아서 한다.

지금의 인터넷산업이 신나게 달릴 수 있는 것도 사이버공간의 고속도로를 한국 정부가 일찌감치 뚫어 놓았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여간 자존심 상하는 게 아니다. 돈이 없나, 기술이 부족한가.

그런데도 인터넷에 관한 한 무모하리만큼 돌진해오는 한국의 벤처사업가들에 대해 당분간은 속수무책임을 인정한다.

인터넷의 소프트웨어시장 자체가 이제 겨우 태동단계인 까닭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마냥 당하고 있을 일본이 아니다. 또한 겁없는 한국 젊은이들의 기세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실력으로 붙어보자" 는 그들의 기세는 대일(對日)열등감에 찌든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면모다.

아무튼 한국의 인터넷분야 도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앞을 내다본 정부 정책과 왕성한 기업가정신이 일궈낸 합작품이다. 정부의 힘과 역할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케 한다.

이장규 <일본총국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