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남북한 화해의 큰걸음 내딛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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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다

지난주 서울의 대형 전자상가 테크노마트 앞에는 고객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바겐세일 때문이 아니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캐릭터 가면을 써보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상가측이 이 가면들을 제작하게 된 동기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고객들이 두 정상의 역사적인 악수를 시연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판촉행사는 서울을 들끓게 했던 정상회담 열기의 한 예에 불과했다.

두 정상의 얼굴이 그려진 머그컵이 백화점에 등장하는가 하면 서울을 방문한 평양교예단은 연일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또 지난 1일 한국의 학생 가수 김정화(19)
가 북한 대중가요를 엮어 발표한 CD ‘통일소녀’는 1주일만에 5만 장이나 팔렸다.

평양 정상회담은 이런 열정적인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두 지도자는 이산가족 재회, 식량 지원 및 투자 증진, 비무장지대의 긴장완화 등을 위한 합의서에 서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양측 다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이나 미군 전투부대의 한국 주둔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언급은 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도 金대통령은 지난주 일본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평양 회담이 “진정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에서 남북의 모든 의견차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金대통령이 김정일의 서울 방문을 설득할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만약 그가 응하기만 한다면 한국인들은 그를 한번 보기 위해 장사진을 이룰 것이 분명하다. (뉴스위크=George Wehrfritz)

▶ "새롭게 열린 공간을 굳게 지켜 나가자"

온 민족의 기대와 전 세계의 주목 속에서 드디어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의 지도자가 한자리에 앉았다.

북한에서는 정권 수립이래 줄곧 통치해 온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취임해 있다. 남한에서는 초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래 여덟 번째인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취임해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벌써 이루어져야 했고 이루어질 수도 있었던 만남이었다. 뒤늦게 열렸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북한과 남한을 상징하는 만남이기도 하다.

그 동안 남북한은 서로를 싸움의 상대,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상대, 믿을 수 없는 상대로만 주로 인식해 왔다. 정상회담은 남북한이 서로를 믿을 수 있고 도울 수 있으며 힘을 모을 수 있는 상대로 보기 위한 인식의 전환을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남북의 지도자가 서로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귀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고, 어느 정도의 경륜과 역량을 가진 지도자인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북한 바로 알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작업이 된다. 북한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분간은 최고의 ‘김대중 전문?? ‘김정일 전문???될 것이다.

이는 남북한 서로가 과거의 왜곡된 이미지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각각 대남, 대북 정책을 펴게 됨을 뜻한다.

나아가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 되는 해이며 새 천년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두 지도자의 만남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원한으로 뭉친 적대의 과거를 화해의 미래로 바꿔간다는 의의를 지닌다.

남북한은 전쟁이 끝난 뒤 50년이 다 돼 가는데도 여전히 휴전체제하에서 1백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첫 번 만남만으로 이러한 상태를 일거에 종식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두 지도자가 적대 관계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란 점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과거 남북한 사이의 어떠한 문서보다도 큰 구속력을 갖게 된다.

우선 남북한 지도자가 분단이래 처음 만나서 이룬 합의인 만큼 역사적 구속력을 갖는다. 나아가 두 지도자가 손을 잡고 전 민족과 전 세계 앞에서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전쟁이 없다고 약속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보다도 무거운 정치적 구속력을 갖는다. 과거 7·4 공동선언이나 남북기본합의서처럼 문서는 만들어 놓았으나 서로 해석이 다르거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와는 다를 것이다.

이산가족이 부분적으로나마 생사확인을 하고 서로 만나게 되는 것도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다. 한반도 근·현대사의 가장 비극인 한반도 ‘디아스포라’(이산)
가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도 남북한 상호간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면뿐 아니라 경제적 상호의존을 확대, 심화시킴으로써 남북이 안보위협 인식을 크게 감소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전쟁의 위협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뒷날로 미루어 놓은 과제도 많다. 아쉬운 점은 金대통령이 과거 식민지 시대 민족운동이나 한국전쟁으로 죽은 북한 사람들이 묻힌 묘소를 참배하지 못한 일이다. 죽은 혼을 위로하는 일은 산 가족이나 친지의 슬픔을 위로하는 일로 통한다. 죽은 혼들이 서로 화해하는 것은 산 사람이 원한을 푸는 일 못지 않게 남북 화해에 필수적이다.

金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박정희(朴正熙)
등 북한이 가장 미워했던 역대 대통령들과 독립지사나 한국전쟁 희생자들이 묻힌 국립 묘지를 참배한다면 이는 역사의 화해이며 한국전쟁으로 빚어진 원한을 푸는 상징적 행동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金대통령이 북한의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뿐 아니라 김일성 주석 묘지를 참배하는 일이 언젠가는 실현되어야 한다. 金대통령과 金위원장에게는 남북 분단과 전쟁으로 희생된 혼들의 한을 푸는 ‘무당’ 역할도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나아가 북한이 요구해서가 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이 안심하고 서울로 오도록 하기 위한 손님 접대 차원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환대’한다는 모순은 성립될 수 없다. 또한 이는 남한 내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신뢰 차원에서도 시급히 풀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는 동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의 분쟁 근원에서 평화의 발신지로 탈바꿈하는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앞으로의 결과는 남북정상회담으로 새롭게 열린 공간을 정부·시민·기업 등 각 주체가 얼마나 메워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뉴스위크=서동만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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