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는 일만 하는 분위기 털어내 … 내년 5~6월 상장 추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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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22면

1993년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은 정유산업 진출을 선언하며 극동정유를 인수했다. 이름도 현대정유로 바꿨다. 극동정유는 64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에 따라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였다. 자신만만하게 출범했지만 현대정유의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90년대 말 외환위기가 결정적이었다. 현대그룹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99년 경영권은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로 넘어갔다. 회사 이름도 현대오일뱅크가 됐다. 하지만 현대는 정유를 포기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이 조선업 호황기에 차곡차곡 모은 자금으로 지난해 다시 경영권을 찾아온 것이다.

현대가 복귀 1년 맞은 현대오일뱅크

현대오일뱅크는 이달 1일 충남 서산시 대산공장에 하루 5만2000배럴의 중질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제2 고도화설비를 준공했다. 대산공장 내 108만3000m² 부지에 이 시설을 짓는 데 2조6000억원이 들어갔다. 고도화설비는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벙커C유 등 저가의 중질유를 휘발유·경유 같은 고부가가치의 경질유로 바꾸는 시설이다. 제2 고도화설비가 완전 가동에 들어가면서 현대오일뱅크는 하루 원유 처리량 39만 배럴 중 12만 배럴을 고도화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고도화율이 30%를 넘어 국내 정유사 중 가장 높다. 고도화율이 높아지면 같은 원유를 들여와 정제하더라도 비싼 상품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어 그만큼 수익성이 좋아진다.

현대중공업이 최대주주로 복귀한 지 1년 만에 업계의 만년 하위권이던 현대오일뱅크는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회사 분위기부터 확 바뀌었다. 권오갑(사진) 현대오일뱅크 사장은 지난해 취임 직후 직원들에게 “회사를 자기 것처럼 생각해 달라”고 주문했다. 10년 이상 외국 자본이 경영을 맡으면서 회사 안에 퍼졌던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자세를 털어내기 위해서다. 그는 이달 1일 제2 고도화설비 준공식에서 “현대중공업에서 33년 근무하다 와서 느낀 점은 수동적이라는 것”이라며 “1년이 지난 이제는 직원들 모두가 스스로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권 사장은 “외국계 경영진이 있는 경쟁사는 보고하는 데만 2주일이 걸리지만, 나는 e-메일로 바로 처리한다”며 ‘스피드 경영’을 강조했다. 그는 “국내시장 점유율을 지난해 18%에서 최근에는 20%대로 끌어올렸다”며 “매년 1%포인트씩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13조3270억원의 매출에 2236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2009년보다 매출은 22%, 영업이익은 32% 늘어났다. 올 들어서도 1분기에만 매출 4조2000억원, 영업이익 2100억원을 거뒀다. 지난해 1분기 적자를 본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적이다. 올 들어 제2 고도화설비의 시험 가동이 시작되면서 수출 역시 활기를 띠고 있다. 올 1분기 660만 배럴이던 수출 물량은 2분기 들어 고도화설비에서 나오는 제품이 늘어나면서 927만 배럴로 늘었다.

권오갑 사장은 “부채비율 개선과 사업다각화를 위한 추가 투자재원 마련을 위해 상장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시장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내년 5~6월 상장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증권업계에서는 현대오일뱅크의 공모 규모가 최소한 1조원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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