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이 물가 잡는거지, 정부가 나서는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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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강경식 전 부총리(左), 강만수 위원장(右)

“나는 물가국장으로 15개월 동안 일했다. 그 15개월의 절반에 해당하는 7개월은 3% 목표 달성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나머지 7개월은 물가를 올리는 일로 정신없이 보내야 했다. 억제와 인상의 양극단의 일을 하면서 행정력으로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나아가 소비자는 물론 기업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절감했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최근 출간된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1972년 말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물론 당시는 정부가 직접 가격 통제를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적어도 정부가 ‘시장친화적’으로 물가관리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만큼 단순 비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에서 반면교사로 삼을 대목이 적지 않다.

 강 전 부총리는 갖은 고생 끝에 3% 수준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생활 안정이라는 물가안정의 근본 목적과는 동떨어진 ‘물가행정’에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허망했다”며 “실질적인 물가안정보다는 3% 목표 달성을 위한 물가지수 관리에 매달렸다”고 썼다.

 그는 (요즘 같은) 원가 상승에 의한 인플레이션에서도 통화관리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불경기를 부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수요 압력을 어느 정도 줄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돈줄을 죄어서 제품이 덜 팔리게 해야 기업이 원가 상승 요인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통화량을 늘리면서 행정규제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방구들에 군불을 계속 때면서 부채로 방안 온도를 낮추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그는 “공권력으로 가격을 효과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면 어느 나라가 인플레이션으로 고심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은 2005년에 쓴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고성장·저물가와 경상수지 적자 개선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큰소리쳤던 96년의 거시정책 조합을 ‘빗나간 정책’으로 평가했다. 경상수지가 악화하던 당시는 환율 처방(원화가치 하락)이 중요했지만 정부가 물가 잡기에 너무 나서는 바람에 스텝이 꼬였다는 것이다.

 그는 “물가는 잡는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라 긴축적인 통화관리, 평가절상, 낮은 관세율, 수입 확대 등에 따른 종합적인 결과”라고 했다. “공공요금 억제나 인위적인 통제를 통해 물가를 잡는다면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 선진국은 중앙은행이 통화관리를 통해 물가를 관리한다. 선진국 정부에 물가관리를 하는 부서를 두고 있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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