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형 이춘헌 ‘자신’ 막내 정훤호 ‘만만’ 근대5종 광저우 금 든든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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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광저우 아시안게임 근대5종 국가대표 정훤호(왼쪽)와 이춘헌이 5개 종목 중 하나인 펜싱 훈련을 마친 뒤 포즈를 취했다. [이영목 기자]

근대5종은 전쟁터에서 전령의 역할을 스포츠로 바꾼 경기다. 적을 찌르고(펜싱 에페), 강을 헤엄쳐 건넌다(수영 자유형). 들판에 말을 잡아타 장애물을 넘는다(승마 장애물 비월). 지친 말을 버리고 두 다리로 달리다가 중간에 적을 만나면 총까지 쏴야 한다(육상+수영 콤바인).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텡은 “근대5종 선수만이 올림픽의 진정한 선수로 불릴 수 있다”고 말했다. 체력·기술·투지를 갖추고 머리까지 뛰어난 만능 스포츠맨을 가리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근대 5종은 체격조건이 좋은 동유럽 선수들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정상에 도전하고 있다.

올해 한국 근대5종이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올해 세 번 열린 청소년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휩쓸었다. 중국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은메달이 1등을 놓친 유일한 대회다. 강경효 근대5종 대표팀 감독은 “요즘 동구권 선수들이 오히려 우리를 견제할 정도”라고 말했다.

근대5종 관계자들은 대표팀 기량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선수로 이춘헌(30·LH스포츠)을 꼽는다. 16년 동안 근대5종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이춘헌은 연습벌레다. 인터뷰 날은 대표팀의 휴가 기간이었지만 그는 한국체대에서 펜싱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5개 종목이기 때문에 쉴 시간이 없다”며 웃었다.

이춘헌은 2004년 모스크바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냈다. 안창식 LH스포츠 감독은 “춘헌이가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딴 이후 한국 선수도 세계무대에서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근대5종의 역사를 새로 쓴 이춘헌은 좌절을 맛본 기간이 더 많았다.

메달을 기대하고 출전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21위에 머물렀다. 이후 1년 넘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졌다. 이춘헌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세계선수권 은메달은 운이 좋아서 딴 것이었는데 내가 잘해서 그런 줄 알았다. ‘이 정도만 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고 회상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는 근대5종이 정식종목에서 제외됐다. 굳은 각오로 출전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긴장해 사격부터 실수를 저질렀다. 33위에 그쳤다.

그는 명예회복을 노리며 훈련을 계속했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 훈련한 것이 독이 됐다. 2009년 승마 훈련 중 왼쪽 무릎 부상을 당했다. 그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10개월 앞두고 수술을 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6개월 재활 과정을 버텼다. 그리고 아시안게임 대표로 뽑혔다.

이춘헌은 대표팀 ‘막내’ 정훤호(22·서원대)를 보면 늘 흐뭇하다. 정훤호는 이춘헌 이후 6년 만에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따낸 신예다. 이춘헌은 정훤호에게 “메달을 반드시 따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이면 안 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다 보면 메달은 따라 오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훤호는 “춘헌형과는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 훈련 파트너였다. 내가 취약한 기술 종목(승마·펜싱·사격)을 특히 많이 배운다”고 말했다.

강경효 감독은 “춘헌이가 팀에 있을 때와 없을 때 분위기부터 다르다. 춘헌이가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어 주고 있다”고 말했다. 맏형이 끌고 막내가 밀면서 한국 근대5종은 세계 정상을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다. 광저우는 그 중간 기착지다.

글=김민규 기자
사진=이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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