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NCIAL TIMES]추락하는 선진국 야당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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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선진국들이 불만스런 업적을 남긴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미국 경제의 회복속도는 느리고, 불확실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펼치는 외교는 나라를 결과를 점칠 수 없는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끝없는 불경기에 시달리는 일본에선 정부의 허약한 개혁 노력마저 반대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해 있다. 영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낫다고 하지만 노동당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프랑스에서도 정부 부처들의 신통치 않은 업무처리 때문에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아가고 있다.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도 경기 침체로 말미암아 '위기에서 또 다른 위기'로 돌진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야당이 처한 상황은 더 나쁘다. 미국의 민주당은 지난달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완패한 뒤 단일한 정치적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민주당은 지도부를 교체했지만 새 지도자들은 당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지 못하고 있다.영국 보수당은 추락을 거듭하고, 올해 대선에서 극우파에 패한 프랑스 사회당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독일 야당인 기민·기사연합은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지만 중앙 정치무대에서는 여전히 표류 중이다. 차기 정권을 차지할 좋은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대부분 선진국의 야당들은 정권에 제대로 도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를 위해 좋은 것이 아니다. 영국·프랑스와 같은 중앙집권화된 의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당(一黨)정치의 위험성은 더 두드러지고 심각하다. 미국에선 정착된 권력분립제도 덕분에 수많은 견제세력들이 연방 정부 외곽에서 눈을 부릅뜨고 단일 집단에 의한 통치를 막아낼 수 있다.

야당의 실종이 '좌파 또는 우파의 물결'과 같은 정치적 대세 때문만은 아니다. 영국에선 2년 전 좌파 정권이 재창출됐고 독일도 좌파가 올해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우파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재의 추세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지난해 9·11 이후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압도적 다수는 정부에 힘을 모아줬다. 야당으로선 안보에 찬성하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게 더욱 힘들어졌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상대 정당의 정책을 훔쳐쓰는 현상이 심해지면서 주류 정당 간에 이데올로기적 차이가 좁혀졌다는 것이다. 선거승리에 상관없이 정당을 단결시켜 온 이념적 응집력이 약화된 것이다. 과거에는 정권을 잃은 뒤 당이 오히려 활기를 띠고, 당의 근본적인 이념을 돌아보고 주요 정책을 수정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현재 영국·프랑스·일본에서 야당들은 정책의 가장 근본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정부에 도전할 의사가 없어보인다. 미국의 민주당도 거대 이슈들에 대안을 제공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것 같다. 이념적 차이가 없어진 지금 야당의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초점이 정부의 관리나 능력 같은 운영상의 문제에만 맞춰질 때 어떤 야심찬 정치인이 야당에 머물고자 할 것인가? '야당 실종'현상이 계속된다면 정치적 논쟁이 사라지고, 무수한 문제와 씨름해야 하는 국가의 능력만 약화될 뿐이다.

정리=정효식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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