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평준화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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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달 내놓은 올해 교육정책 분석 보고서에는 우리나라 고교 평준화 정책의 공과(功過)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보고서를 보도한 기사의 제목이 '교육비 대비 학력 수준 한국이 최고' '한국 학생 최상위가 드물다'로 엇갈리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학생(고1 기준) 1인당 평균 교육비는 23개 회원국 가운데 18위에 불과하지만 '읽기와 이해력' 성적 평균점은 4위, 학생 개인 간·학교 간 학업 성취도 차이는 OECD 평균치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분석은 평준화 정책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반면 학업성취도 성적을 6등급으로 나눌 때 우리나라 최상위 등급 학생의 비율(5.7%)이 OECD 회원국 평균(9.5%)에 크게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등위로도 18위에 머물렀다는 분석은 평준화 정책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 보고서에 우리 학생이 최하 2개 등급에 속하는 비율(5.7%)은 OECD 평균(17.9%)의 3분의1 수준이다. 중간층에 학생들이 대거 몰려 있는 것은 우리 교육이 수월성 추구엔 취약하지만 평등주의 교육에 기여한 측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1974년 도입된 뒤 그동안 확대-축소와 보완을 거듭해온 고교 평준화 정책은 올해 경기도의 6개 도시가 합류함으로써 현재 전국 23개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다. 전국 인문고 가운데 50.4%, 전체 고교생 가운데 68%가 이 제도의 적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교 평준화 정책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논쟁 대상이 됐던 사안도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60% 이상의 지지를 받는데도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이 문제가 교육 차원을 넘어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번 대통령 선거 기간에도 고교 평준화 문제는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고, 이제 이틀이 지나면 새 대통령이 나온다. 고교 평준화 정책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학생들의 학력이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 공부하는 학교를 만들겠다"(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거나 "초·중등 교육에 경제원리 도입은 상당히 위험한 요소를 갖고 있다"(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고교 평준화에 대한 두 후보의 입장 차이는 분명하다.

李후보는 고교 평준화 정책을 점진적으로 개선한다는 입장이다. 고교 선지원-후추첨 입학방식을 확대하고 자립형 사립고와 특성화고교를 더 늘리겠다고 한다. 특히, 일정 요건을 갖춘 사립고가 희망할 경우 자립형 사립고로 전환시켜 학생 선발과 교육과정 운영에 자율권을 주겠다고 한다. 이는 결국 사립고부터 점진적으로 평준화를 푸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盧후보는 평준화의 기본틀을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지역 간·학교 간 교육여건의 평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자율학교·특성화고·특수목적고 등 학교형태와 교육프로그램을 다양화하겠다고 한다.

자립형 사립고 확대에 대해서는 일류고 입시병과 학벌주의를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유보적인 입장이다. 다만 정책 공조 및 국정 공동책임을 합의한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의 교육정책이 얼마만큼 영향력을 가질 것인지 미지수다. 鄭대표는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 확대 등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평준화 제도를 단계적으로 수정 또는 해제하는 쪽에 기울어 있다.

29년을 이어온 고교 평준화 정책은 이제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 있다. 속도가 문제일 뿐 어떤 식으로든 변화의 바람을 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교육 대통령'을 자임한 후보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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