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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의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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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힘들여 책을 써도 보상은 신통치 않다. 많은 대학은 여전히 저서나 번역서를 논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업적 평가에서 제외한다. 독자들이 책을 찾아주면 좋겠지만 그도 여의치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독서율 꼴찌 수준인 우리 국민의 반응은 시들하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대화』에서 털어놓은 글쟁이의 신세타령이 뼈에 사무친다.

“저는 올해(1990년) 일곱 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의 아무 것도 모르는 교수들이 절 만나면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야, 넌 교수 때려치우더니 돈 벌었더구나. 책 내기만 하면 얼마나 돈이 쏟아지겠니?’ 그러나 인문서적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히트 쳐야 1만 권이면 주저앉습니다. 참 실망스럽지요. 사천 원짜리 책 1만 권이면 그 10% 인세가 4백만원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1년에 5권의 베스트셀러를 내도 제 수익은 2천만원, 팽팽 놀아 처먹는 교수들 1년 월급도 되질 않습니다. 제 어깨는 떨어져 나갑니다.”

그나마 1990년이니 1만 권이지 요즘 사정은 더욱 나쁘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인문서 초판을 2000, 3000권도 찍었는데 요즘은 500권, 1000권이 고작이다. 정가 2만원짜리 책을 1000권 찍어봤자 인세수입은 200만원이다. 독서 인구는 끝없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니 책 쓸 시간에 논문을 쓰는 게 훨씬 유리하다. 잘만 하면 논문 한 편에 연구비를 2000만원도 받을 수 있고, 책 한 권 쓸 시간과 노력이면 논문 5, 6편은 쓸 수 있으니 교수들이 논문에만 매달리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인문학자가 굳이 힘들여 책을 쓰는 이유는 인문학의 본령이 ‘소통’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논문 한 편 써 봐야 독자는 학술지 심사위원 두어 명뿐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한다.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글이 대중에게 읽힐 리 없다. 결국 인문학자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지점은 ‘책’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다수 교수들은 상아탑 안에 숨어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아니, 일부 뜻 있는 교수들을 제외하면 소통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다. 제도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니 평생 인문학 교수 했다면서 대중과 소통 가능한 저서 한 권 없이 정년을 맞이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이들을 인문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일생 ‘가지 않은 길’을 외면하고 틀 속에 갇혀 제도가 시키는 일만 한다는 점에서 ‘인문 기능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에게 인문학 위기는 인문학 교수의 밥그릇 위기일 뿐이다. 인문학 위기 담론이 무성해지면 위기 극복을 위한 논문 쓰겠다며 연구비를 신청하는 난센스가 연출된다. 인문학자에게 논문은 필요조건이지만 그렇다고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문이란 형식 자체가 자연과학 방법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문학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는 점도 성찰해야 한다. 『로마제국쇠망사』의 에드워드 기본이 논문 썼다는 말 들어봤는가.

제도적 격려도 거의 없고 독자도 찾기 힘든 현실에서 소통을 위한 인문 콘텐트 생산에 박차를 가하자면 자기 최면이 필요하다. 내 경우는 책 한 권이 국회의원 한 명의 4년 의정활동과 같은 중요성을 갖는다고 자기 암시를 한다. 저·역서가 10권이면 10선 의원급이다. ‘서생 주제에’ 하며 비웃을 독자가 있을지 모르나, 이렇게라도 의미 부여를 하며 자긍심을 불어넣어야 버틸 수 있다.

제도 밖에서 노력을 기울이는 인문학자들은 거칠게 비유하자면 ‘인문학 의병’들이다. 대학 안에도 있고 대학 밖에도 있다. 그들은 소통이야말로 인문학 위기 돌파의 유일한 길이며, 우리 사회의 소프트파워를 향상시키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소통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관군(官軍)’인 인문 기능인과 구분된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학문 후속세대의 단절마저 우려되는 현 상황에서, 얼마 남지도 않은 그들에게 소통의 짐을 떠넘긴 채 나 몰라라 해도 대한민국의 앞날이 창창할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