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 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유럽에서 광우병 파동이 한창이던 1996년 3월 말, 쇠고기 판매량이 뚝 떨어진 가운데 영국의 대표적인 수퍼마켓 체인 '세인즈베리'가 쇠고기를 반값에 세일하기 시작하자 '용감한' 소비자들이 몰려들어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손님들 가운데는 한국 유학생·주재원들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런던에 머물렀던 한 지인은 "스코틀랜드 검정소에서 나온 최고급 설로인(소의 허리 윗부분 살) 스테이크를 헐값에 즐기는 재미가 쏠쏠했다"며 입맛을 다셨다.

한국인의 배짱은 국제적인 경쟁력을 자랑한다. 비브리오 패혈증이 유행하면 "싸게 포식할 기회"라며 일부러 횟감이나 조개구이를 찾아 나선다. 구제역이 나돌 때는 식당주인에게 칙사대접을 받아가며 삼겹살로 배를 채운다.

폭탄주 습관이나 세계 1위의 주가지수 선물(先物)·옵션 거래량도 한국형 배짱문화의 변형된 모습이 아닐까. 이런 배짱이 월드컵 4강 진입을 도왔지만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폭삭 무너져내린 비극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배짱은 신념이나 투지·용기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무모함·뻔뻔스러움으로 흐르기도 쉽다. 한국의 경우 식민지 시절이나 6·25를 겪은 데서 오는 일종의 '재난증후군'에다 수십년 군사독재에서 다져진 '하면 된다' 정신이 배짱문화를 키웠다고 보는 이가 많다. 멀리 조선시대의 근본주의적 유교 성향을 거론하는 사람도 있다.

비교정치학자 루시안 파이는 한국인의 이런 특성을 얄미울 정도로 짚어냈다. 그는 명백히 위험한데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려는 '위험감수 문화(risk-taking culture)'를 한국인의 특이한 정치문화로 보았다. 또 조선시대 유교정치 문화의 특징을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한 행동스타일, 즉 '극단성(extremeness)'에서 찾았다.

북한이라고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같은 역사적 배경에다 분단 후 독재정치가 계속되고 있고, 강성대국·선군정치 구호가 난무하는 곳이다. 핵개발 시인 후 나오는 평양발 담화들에서는 배짱문화가 물씬 풍겨나온다.

지난 6월 서해교전 이후 잠잠하다 싶던 북한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북한의 도발이나 억지가 담고 있는 '명백한 위험요소'를 애써 외면해 온 우리측 '배짱'도 일조했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jaiken@joongang. co. 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