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난파선원 4명 24시간 사투 끝 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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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해경 헬기가 강원도 삼척시 궁촌동 앞바다에서 좌초된 코리코 303호에서 선원들을 구조하고 있다. 이 사고로 선원 3명이 숨지고 4명이 구조됐다. [연합]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떻게 구조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지난 16일 오전 8시45분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해안초소 앞 해상에서 좌초됐다가 17일 오전 구조된 제주선적 코리코 303호 선장 최왕림(52)씨는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 선장 등 선원 7명과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싣고 동해항으로 순항하던 이 배에 위기가 닥친 것은 16일 오전 7시40분쯤. 항해사 구상윤(61)씨가 "엔진 추진기가 고장 났다"고 고함을 쳤다.

선장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다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온 최 선장의 눈앞에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성난 파도가 배를 삼킬 듯이 몰아쳤다.

"8m 높이의 갑판 위로 10m 이상의 높은 파도가 몰아치고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강풍이 불었어요. 선원생활 25년에 그토록 큰 파도는 처음 봤습니다."

860t급의 배는 파도가 치는 대로 종이배처럼 힘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엔진 추진기가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으로 과부하가 걸리면서 고장이 난 것이다.

잠에서 깬 선원들은 큰 바위에 좌초되지 않기 위해 풍향과 조류에 맞춰 조타기를 돌리며 아슬아슬한 곡예를 시작했다.

파도와 싸운 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배는 육지 쪽 400여m쯤 떨어진 곳으로까지 밀려나와 바위에 부딪히면서 두 동강이가 났다. 선원들은 선미 쪽에 있는 조타실 밖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선실에는 이미 물이 차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배를 때리는 파도를 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간간이 헬기 소리가 들렸으나 곧바로 되돌아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해안에서는 해경 구조대와 119구조대가 대기하고 있었으나 악천후로 구조작업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육지에서 좌초된 배에 로프 총을 쏴 구조를 시도했다.

항해사 구씨가 로프를 잡고 육지로 나갔으나 높은 파도로 바닷물을 많이 마신 데다 체온마저 급격히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 구조대의 구조활동이 중단되고 어둠이 깔리면서 선원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들은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방한복을 있는 대로 껴입고 파도에 휩쓸려 배 아래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어깨동무를 하며 다리를 서로 꼬고 앉아 한 몸이 돼 버텼다. 체온을 서로 나누기 위해 볼을 서로 맞대고 있었다.

최 선장은 선원들에게 "정신을 잃으면 죽는다. 가족을 생각해라"고 수없이 외쳤다.

그러나 기관장 정인명(67)씨가 17일 오전 3시쯤부터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더니 한 시간쯤 지나 몸이 싸늘하게 식은 채 넘어졌다. 오전 5시30분쯤엔 조리장 이두래(67)씨마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던 선원들은 공포감에 정신마저 희미해져 갔다. 그러던 순간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면서 구명줄이 내려왔다. 24시간 만의 사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삼척=홍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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