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달러' 마침표 찍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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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미국의 경기침체와 9·11 테러 등 온갖 악재에도 꿋꿋했던 달러 값이 최근 하락세를 보이면서 본격적인 달러 약세 시대가 닥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4일 "국제 투자자들이 미국자산에 대한 투자에 흥미를 잃고 있다"며 "(달러화가) 단시일 내 급락하지는 않겠지만 점진적인 달러 약세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달러 약세를 점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금리 인하와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다.

지난 6일(현지시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0.5%포인트 낮춘 반면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금리를 동결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유럽의 금리 격차가 더 벌어졌고,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는 자금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이동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8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는 1차 저항선인 달러당 1백20엔을 깨고 달러당 119.84를 기록한 뒤 계속 약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는 유로화에 대해서도 지난 7일 유로당 1.0132달러를 기록, 4개월 만에 최고치를 보인 후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의 금리 인하로 3개월 만기 정기예금을 기준으로 달러화 자산과 유로화 자산의 수익률이 1.8%포인트나 차이가 난다고 분석했다. 이같은 수익률 차이는 1999년 유로화가 도입된 이후 최대치다.

최근 일주일 새 수익률 차이는 더 벌어지는 추세다.

이에 따라 미국으로 향하던 국제자금이 방향을 틀고 있다는 관측이다.

JP모건에 따르면 2000년 2월부터 1년간 미국 회사채에 대한 투자액이 2천5백억달러였던데 비해 지난 8월 말까지 1년간 투자액은 1천8백억달러에 그쳤다. JP모건의 외환 투자전략가인 풀 메기에시는 "투자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기 회복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증거"라며 앞으로 달러 수요가 늘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또 "올해 5천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감안할 때 달러 가치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매일 19억달러씩의 해외 투자자금을 유치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며 "앞으로 달러 값이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전망했다.

HSBC의 외환 투자전략가인 데이비드 블룸은 "미국의 금리 인하는 현금 수익률이 낮아지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며 "미국의 기준 금리가 유로존보다 2%포인트, 영국보다 2.75%포인트 낮은 상황에서 대규모 경상적자를 메울 수 있는 자금이 유입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자산 이외에 달리 마땅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에 달러가 급락하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달러 자산을 잔뜩 갖고 있는 일본 등 아시아 중앙은행들이 자국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달러화의 급락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UBS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조지 매그너스는 "달러가 급락하면 자산시장의 혼란으로 세계 경제의 회복에 해가 되겠지만 점진적인 약세는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의 구조조정을 돕는 긍정적 작용을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정재 기자

jjyee@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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