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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ROTC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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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걸프전의 영웅 콜린 파월은 미국에서 흑인 최초로 합동참모본부의장과 국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하지만 대학에 학군사관(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제도가 없었다면 그는 잘해야 지리학자나 평범한 월급쟁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뉴욕시립대학에 다닌 파월은 전공인 지리학에 흥미를 느꼈지만 대학 생활은 시들했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다. 그러나 3학년 때 ROTC에 지원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ROTC가 생애 처음으로 흑인인 자신을 떳떳한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는 학생 연대장으로 활동하며 사람과 조직을 다루는 리더십을 쌓는다.

파월은 ROTC 장교 임관 후 베트남전에 자원했다. 한국에도 베트남전 참전 ROTC 장교가 적잖다. 국민배우 안성기도 그 대열에 낄 뻔했다.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진학한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ROTC에 지원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졸업 무렵 철군(撤軍)이 시작됐다. 베트남 꿈을 접고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요즘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 영화 촬영에 한창이다. 신라 장수(將帥) ‘이사부’ 역이다. ROTC 장교 정신이 녹아들면 실감 나는 장수 연기는 거저 되지 않을까 싶다.

ROTC 출신은 한때 기업에서 1순위로 뽑아줄 정도로 몸값이 상한가였다. ROTC 출신이 삼성그룹 CEO 셋 중 하나이고, 상장회사 임원급에도 5000여 명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리더십과 책임감, 조직관리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 덕분이었다. ROTC 출신에겐 ‘3무(無) 1존(存)’이라는 말도 따라다닌다. 학연·지연·혈연에 휩쓸리지 않고(3무), 오직 선후배만 있다(1존)는 거다. 여기에다 1무(無)를 보탠다면 ‘여성’이다. ROTC는 1961년 도입 이래 금녀(禁女)의 영역인 것이다.

이런 금기가 이제 깨질 모양이다. 국방부가 올 하반기에 시범적으로 60여 명의 여성 ROTC 후보생을 선발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아직 반론이 만만찮다. ROTC 후보생들이 4개월간 입소교육을 받는 광주 상무대의 구호는 ‘나를 따르라’다. 여성의 특성상 이게 가능하겠느냐는 게 반론의 요지다. 그러나 현대전에서 굳이 남성만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김옥이 한나라당 의원이 여대생 500명에게 물었더니 94%가 ROTC 여성 개방에 찬성하고, 36%가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한국의 ‘여성 콜린 파월’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