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컴 발끝서 나온 잉글랜드 8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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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덴마크 선수들은 주술에 걸린 것 같았다.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너무 얌전했으며 좋은 기회를 잇따라 날려버렸다.

프랑스를 집으로 돌려보낸 용맹한 덴마크 선수들을 주술의 늪에 빠뜨린 사람들은 바로 잉글랜드 응원단이었다.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브라스 밴드 소리와 쩌렁쩌렁 울리는 힘찬 노랫소리에는 분명 그라운드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힘이 있었다.

전반 5분. 덴마크 진영으로 평범한 롱킥이 날아갔다. 충분히 여유있게 처리할 수 있는데도 마르틴 라우르센이 헤딩으로 코너킥을 만들어줬다. 당연히 데이비드 베컴이 찼다. 크게 휘어져 나가는 볼을 수비수 리오 퍼디낸드가 헤딩했다. 골키퍼 토마스 쇠렌센의 품에 들어갔다 빠져나온 볼은 원바운드된 뒤 골라인을 넘어버렸다. 세계적인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의 후계자임을 자부하는 쇠렌센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전반 22분 추가득점은 잉글랜드로서는 세가지 의미가 있는 골이었다. 세트플레이가 아닌, 베컴의 발을 거치지 않은, 주포 마이클 오언의 대회 첫번째 골이었기 때문이다. 왼쪽 사이드라인을 파고든 트레버 싱클레어가 크로스를 날렸다. 가운데로 날아온 볼을 니키 벗이 논스톱 패스했고, 수비수를 맞은 볼이 오언의 발 앞에 떨어졌다. 오언의 왼발에 걸린 볼은 어김없이 네트에 꽂혔다.

전반 44분 갑자기 쏟아진 빗속에서 잉글랜드의 세번째 골이 터졌다. 이번에도 베컴이 개입했다. 미드필드 오른쪽 스로인을 덴마크 수비수가 헤딩으로 걷어낸다는 게 베컴의 몸에 걸렸다.베컴이 가볍게 밀어준 볼을 에밀 헤스키가 논스톱 슛, 그물을 흔들었다.

전반에 이미 결정된 승부였다. 스벤 고란 에릭손 잉글랜드 감독은 8강전에 대비한 듯 후반 들어 오언과 폴 스콜스를 빼버렸다.

후반 20분쯤부터 잉글랜드 응원단의 기차놀이 퍼포먼스가 시작됐다. 뱀처럼 꾸불꾸불한 행렬이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만들어졌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틈을 타 덴마크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런데 풀린 것같던 주술이 또 덴마크 선수들을 덮쳤다. 후반 22분 카스페르 뵈겔룬이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날린 통렬한 슈팅이 골대로 빨려들어가는 순간 동료 욘 달 토마손의 머리를 맞고 아웃됐다. 이후 맞은 몇차례 찬스도 철벽 같은 잉글랜드 중앙수비와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의 선방에 막혔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잉글랜드 선수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덴마크 선수들에게 유니폼을 벗어 선물로 주었다.

니가타=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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