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밤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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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제16대 대통령 취임식이 진행되는 2003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이회창(會昌) 신임 대통령이 취임사를 낭독하고 있다. 늦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취임식이 끝날 때만 기다리던 국회의원들과 주한 외교사절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단상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해온 대북 햇볕정책이 그 기본줄기에서 올바른 선택이었으며…본인도 대북 포용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에게 약속드립니다"는 대목이 낭독되고 있었다.

국방백서 主敵 표기 삭제

신임 대통령은 이어 "저는 지난해 국방백서가 주적론(主敵論) 폐기 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발행되지 못했던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국민 여러분과 국회가 동의해주신다면 본인은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란 표현을 삭제할 것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는 목이 마른 듯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물을 한모금 마시면서 장내를 둘러보았다. 취임식장은 잠시 침묵과 긴장이 흘렀다. 어느 순간 한 구석에서 박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립해 박수를 쳤다. 여기 저기서 환호가 터져나왔다. 처음엔 떨떠름한 표정이었던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도 분위기에 압도된 듯 결국에는 박수대열에 동참했다. 대통령은 "내가 정치권에 몸담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이같은 진정한 지지와 박수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하고 돌이켜 보았다.

#2.새 정권이 출범한 지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2003년 5월 초순 어느 날. 전날 갑자기 일정이 잡힌 기자회견 때문에 청와대 공보수석실 직원들은 밤을 꼬박 새면서 준비를 해야 했다. 거리에서는 노동계의 과격시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고, 이에 따라 경제상황도 악화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며칠째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춘추관 회견실에 들어선 대통령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초췌했다. 평소의 싱글싱글 웃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회견을 시작하기 전 청와대 대변인은 "회견은 노동문제와 경제문제에 국한된 내용입니다. 기자 여러분도 오늘만은 이 분야에 대해서만 질문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고 주문했다.

단상에 선 대통령은 손수 준비한 회견문을 읽어나갔다. "…노동계의 불법폭력시위로 경찰이 희생되고 공권력은 위협받고 있으며…본인은 이같은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앞으로 과격시위에 대해서는 법대로 엄격하게 조치할 것임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대통령의 어조는 단호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우리 국가의 기본철학입니다. 따라서 사유재산은 철저히 보장돼야 하며…. 철도와 전력산업의 민영화도 확고히 추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회견장에 있던 기자들과 TV로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기업인, 야당 의원들도 깜짝 놀랐다. 다음날 행자부와 노동부·산자부의 후속조치 발표가 이어졌다.

밥그릇론 접고 법대로 외쳐

#1과 #2의 장면은 현재로서는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어느 대통령후보 쪽도 이런 발상의 전환을 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핑퐁외교로 '죽의 장막' 중국의 문을 활짝 연 사람은 닉슨 대통령이었다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정치인인 공화당 소속의 닉슨이 중국의 개방을 추진했기에 미국 내 반발을 누를 수 있었다.

이회창 대통령이 주적론을 폐지하고 대북 포용정책을 폈을 때, 평소 "법보다 밥이 우선"이라며 '밥그릇론'을 주장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법대로'를 외칠 때 국론의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훨씬 적을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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