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1국 맹렬팬 '월드컵 同居' 응원땐 敵 … 축구 사랑엔 동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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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휴가를 주지 않으면 사표를 쓰겠다'고 하자 회사측이 보름간 휴가를 주더라구요. 곡절은 겪었지만 마침내 한국에 와 우리 팀의 경기를 직접 보게 돼 꿈만 같습니다."

1일 아침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강공원 난지지구 내 월드컵 캠핑장.

중국 축구응원단 '추미(球迷)' 회원인 스진쥔(施進軍·24·회계사)은 "월드컵 후원사에 다니는 친구를 2년간 졸라 간신히 구한 중국팀 경기 입장권이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면서 씩 웃었다.

"매달 월급의 15%를 저금해왔다"는 그는 "적은 비용으로 월드컵 경기와 한국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정보도 잔뜩 수집해 왔다"며 시내관광을 나갈 채비로 바빴다.

7천여평 부지에 1백70여개 4인용 텐트가 설치돼 지난달 20일 오픈한 이곳은 요즘 세계 각국에서 온 배낭족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미국·프랑스·핀란드·남아공·슬로베니아·브라질·폴란드 사람, 그리고 자기네 나라에서도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데 한국에 온 일본인 등 1일 현재 11개국 1백여명이다.

'월드컵 관람을 위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을 입촌(入村)대상으로 하다보니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축구광들이고, 제각각인 개성만큼이나 사연도 가지가지다.

친척 여섯명이 함께 경비를 모은 뒤 그 중에서 두명을 고르는 제비뽑기에 당첨돼 서울에 왔다는 폴란드인 미하우 미셰크-민스키(25·보험조사관)는 폴란드에서 축구열기가 가장 높다는 남부 크라쿠프 출신이다.

미셰크-민스키는 "석달 전 교통사고를 당해 몸은 좀 불편하지만 일생일대의 행운을 직접 누리고 싶어 만류하는 부모님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폴란드의 첫 상대가 한국팀으로 결정되자 폴란드에선 한국의 물가·특산물·관광명소 등에 대한 정보가 쏟아지는 등 한국 붐이 일고 있다"며 "월드컵 경기장까지 걸어서 20분, 하루 1만2천원이면 되는 텐트 한개 사용료, 밤이면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에다 주변의 강변 풍치까지 빼어나 최적의 캠핑장"이라고 치켜세웠다.

부인, 조카 둘과 함께 한국을 찾은 엘리오 베티(51)는 프랑스 프로축구 3부리그의 심판이다.

그는 "프랑스팀의 예선 세 경기와 한국 관광을 위해 지난 3년간 휴가를 집에서 보내면서 저축했다"며 "코엑스몰·광화문 등지의 길거리 응원전과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박수를 치는 응원이 매우 흥겹고 인상깊다"고 했다.

슬로베니아 텐트촌의 이바 브티나(25·여·대학생)는 10개월째 배낭을 메고 세계여행 중인 축구광.지난 3월말 함께 여행하는 남자 친구를 설득해 월드컵 기간에는 한국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바꾼 뒤 입장권 구하기에 나섰다.

하지만 체류 장소가 수시로 바뀌는 배낭족인지라 입장권을 받을 방법이 마땅찮아 속을 태웠다. 결국 집으로 수십 차례 국제전화를 하며 입장권을 배달해줄 사람을 수소문, 슬로베니아에서 한국으로 오는 보따리 장수를 통해 표를 받았다고 한다.

브티나는 "지난달 31일 월드컵 경기장 앞에서 표를 넘겨받기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캠핑장은 축구만 좋아하면 누구나 금세 친해져 얘기꽃을 피우는 화합의 장소다.

지난달 31일 캠핑장에 들어온 일본인 유스케 반노(21·대학생)는 "일본에서도 축구경기가 열리지만 개막전이 열리는 한국만큼 월드컵 열기가 뜨겁지 않아 박진감 넘치는 축제 분위기를 맛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면서 "영어는 잘 못하지만 세계 각지에서 온 남녀노소 배낭족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동행한 그의 친구 히데토모 다나카(21)는 "개막전 경기에서 세네갈팀에 프랑스팀이 의외의 일격을 당하자 프랑스 텐트촌 친구들이 매우 침통해했다"며 "그래서 다들 맥주를 싸들고 가 프랑스 친구들을 위로했다"고 말했다.

월드컵이 막을 내릴 30일까지 이곳 '외인 캠프'에서는 별나고 재미있는 풍경과 얘깃거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정용환·김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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