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2세'가 꽃피운 출판 르네상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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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2002년부터 시작된

독서 열풍.

아파트 지을 때

가족 독서실이 없으면

분양이 안되는 나라 한국

그 축복 아래

당시 어린이들은

세계를 휘어잡은 지식의

거목으로 우뚝 자라났다.

2019년 5월 6일, 맑음

오랜만에 일기를 쓴다. 북리뷰지 '뷰'의 김철수 전문기자를 만났다. 순진하게 웃는 모습이 여전했다. 30대 중반임에도 어린아이 같은 그의 얼굴은 그가 우리 시대의 최고가는 지성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게 만든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난해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고, 그의 역저 『지(知)의 역사』가 퓰리처 상을 비롯해 각종 국제적인 저술 상을 휩쓸며 전세계적으로 벌써 1천만 권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시사저널'이 매년 실시하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언론인' 여론조사에서도 내리 3년째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김철수 기자.

오늘 나를 찾으면서는 이번 달치 '뷰'를 한 권 가지고 왔다. 아직 서점에 깔리기 전이니 따끈따끈한 것이라며 예의 순박한 미소를 얹어 건넨다.

'뷰'는 창간 때 발기위원으로 참여한 나에게 예상치 못했던 자부심과 보람을 가져다 준 잡지다. 14년 전 이 잡지를 창간할 때 이 잡지가 이토록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현재 한글판이 매월 55만부씩 나가고 7년 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영문판도 34개국에서 매월 2백만부 정도 나간다. 전 세계에서 발행되는 인문·사회·자연과학 분야의 주요 전문서와 교양서들을 리뷰·프리뷰·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각도로 왕성하게 소개하고, 탁월한 분석력과 쉬운 서술로 핵심 내용을 다이제스트해주는 이 잡지는 이제 전 세계 모든 지식인들과 교양인·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됐다.

얼마 전 영국 옥스퍼드대의 한 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어느 나라 학자들보다도 한국 학자들의 타학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고 한다. 하기야 '뷰'말고도 유사한 도서잡지가 대여섯 종이 더 있으니…. 최근 몇 년간 거의 매년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것도 이런 지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2001~2002년께 시작된 '출판 르네상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책 좀 보자는 캠페인성 흐름으로 시작돼 일과성으로 끝나지 않나 싶었던 출판 르네상스. 그러나 어느덧 미풍은 돌풍이 되고, 돌풍은 폭풍이 되어 이제는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출판 종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돼 버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열혈 독서광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아파트를 지을 때 가족 독서실이 없는 경우는 아예 분양이 안 된다고 하니 참으로 세태의 변화가 무섭다. 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부는 것도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번역서를 가장 많이 내는 나라인 탓에 한국어를 알면 동서양 고전부터 최신 저작물까지 손쉽게 섭렵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나저나 지금 생각해도 출판 르네상스 때 가장 축복이었던 것은 당시 어린이들이 유례 없는 책벌레로 컸다는 사실이다. 마침 그들의 부모가 그 어느 세대보다 책을 많이 읽은 386 세대여서 독서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까닭에 오늘날 '386 2세'들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김철수 기자는 그 첫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독서와 여행, 예술에 대한 이해를 심지어 학교교육보다 더 중시했다고 한다. 학원 한 번 안 가본 덕에 소위 명문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는 오로지 고전을 읽기 위한 목적으로 일찍이 한문과 라틴어·그리스어 등을 습득하고, 오늘날 동서고금을 종횡하는 지식의 거장이 됐다.

불과 20대 후반의 나이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박영희, 할리우드를 제패한 30대 초반의 영화감독 이영남, 29살의 나이에 차세대 IT 산업의 주역이자 세계적인 자선사업가가 된 최훈…. 그 공로를 어린 시절의 독서로 돌리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내가 이 세대의 부모세대라는 것이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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