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행… 은폐… 어처구니없는 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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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3월 경기도 하남시에서 공기총 여섯발을 맞고 살해된 여대생 H양의 주변인물 미행에 현직 경찰관 다섯명이 동원됐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경찰에 따르면 H양 살해사건의 배후 인물로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A씨의 부탁으로 서울 구로서 보안계 직원 다섯명이 H양과의 관계를 의심받던 법조계 인사 B씨를 다섯 차례나 미행했다는 것이다.

경찰관들의 미행 행각도 어이없지만, 이들의 행위가 드러난 뒤 경찰의 대응 또한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구로서 형사들의 미행 혐의는 지난달 A씨 계좌를 추적하던 서울 강남서 형사들에게 처음 포착됐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A씨의 계좌에서 구로서 경찰관에게 10만원권 자기앞수표 여섯장이 들어간 사실과 경찰관 다섯명이 미행에 동원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지난 3일 관련 경찰관 세명을 파면하고 두명을 해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이같은 사실을 한달 가까이 쉬쉬해 왔으며 관련 경찰관들을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

서울 강남경찰서 측에선 "검찰 지휘를 받아 H양 살해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 광주경찰서로 관계 자료를 넘겼다"고 설명한다. 이에 광주서는 "H양 살해사건 수사가 마무리된 뒤 이를 다루려 했다"고 발을 뺀다.

H양 살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실종 장소부터 살해 현장까지 샅샅이 뒤지며 손톱만한 연결고리에도 매달리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동료 경찰을 보호하려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도가 지나쳤다는 말이다.

경찰이 한달 가까운 자체감찰을 통해 밝혀낸 사실은 '미행에 동원된 경찰관들이 A씨로부터 받은 60만원은 미행 대가가 아니라 통화 녹취 비용'이라는 것이다. 미행한 형사 가운데 한명이 A씨의 남편과 초등학교 동문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친구의 부탁으로 현직 경찰관이 동료들까지 동원, 입건조차 되지 않은 사건 관련자를 조직적으로 미행했다는 얘기다. 또 60만원이라는 돈을 받고 경찰관 다섯명이 불법 미행에 통화 녹취까지 해줬다는 설명이다.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하면서 믿으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최근 경찰은 최규선 게이트 등 각종 비리사건에 주연과 조연 등으로 잇따라 등장해 국민에게 실망과 허탈감을 안겨주고 있다. 살인사건 수사과정에서 돌출된 소속원들의 불법 행동까지 은폐하려는 시도를 지켜보면서 경찰의 기강과 신뢰감에 심각한 회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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