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자 없이 '90분 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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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30일 김영삼(金泳三·YS)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찾았다. 1990년 3당 합당 때 YS에 등을 돌린 이후 무려 12년 만이다. 이른바 신민주 대연합의 첫단추를 YS와의 관계개선으로 꿰보겠다는 盧후보의 의지가 곳곳에 드러났다.

YS가 거실에 나타나자 5분 전부터 기다리던 盧후보는 허리를 45도 굽히며 깍듯이 인사했다.사진기자들이 요청하자 두번이나 더 꾸벅 절했다.YS는 말없이 미소지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운을 뗀 盧후보는 앉자마자 차고 있던 금테 둘린 시계를 꺼내보였다.

"총재님이 89년께 일본에 다녀오면서 사오신 시계인데 아주 정확해서 계속 찼습니다. 그러다 총재님을 비난할 때는 끌러놨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생각이 다 맞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총재님 생각나면 한번씩 차곤 했습니다. 97년부턴가는 계속 차고 다닙니다. 이번에 대통령후보에 당선될 때도 차고 있었죠."

그러자 YS는 "정말 장하다. 여당의 대선후보가 되기까지 보통 험한 길이 아닌데 얼마나 장하냐"며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盧후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모습이 저보다 훨씬 멋있다""총재님 뵙고 난 뒤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는 등 찬사를 계속했다. 기자들이 자리를 비킬 무렵에는 YS 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대통령님,찾아뵈니까 정말 감개무량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무려 1시간30분 동안 밀담을 나눴다. 밀담을 마친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다. 盧후보는 대문 밖까지 배웅 나온 YS에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라며 인사했고, 세발짝쯤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깍듯이 절했다. YS도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YS의 대변인격인 박종웅(朴鍾雄) 한나라당 의원은 "옛날 얘기는 물론 최근 정치 전반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회동 결과를 설명했다.

만남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의 측근들은 '덕담'을 주고받았다. 盧후보를 동행한 신상우(辛相佑)전 국회부의장은 "여러 차례 YS에게 '盧후보 손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는데 한번도 거부반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며 "여기서 YS가 (盧후보의)손을 들어주면 그것으로 승부는 끝난다"고 주장했다.

朴의원도 "나는 YS가 하라는 대로 할 것"이라면서 "盧후보가 처신을 잘하고 있다"며 호감을 표시했다. 盧후보측 유종필 특보는 "12년 만에 옛 스승을 찾아뵙고 좋은 얘기를 나눴다"며 "오늘 만났을 때와 헤어질 때의 분위기를 유심히 봐라. YS 스타일에 비춰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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