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조스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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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선 결선투표 진출이 좌절된 '일요일의 충격' 사흘 만인 24일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좌우 동거정부의 마지막 국무회의에 참석,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각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대통령과 총리의 전통적 독대(獨對)시간인 여느 수요일과 마찬가지로 오전 9시45분 엘리제궁에 도착한 조스팽 총리는 그를 맞은 시라크 대통령에게 "지난 5년간 예의있고 성실한 태도로 정부를 이끌어준 데 감사한다"고 말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조스팽 총리의 손을 잡으며 "우리는 그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국민들이 맡긴 공화국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답례했다. 그동안 두사람이 펼쳐온 불꽃 튀는 신경전과 은밀한 긴장관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면담을 마친 두사람은 오전 10시20분 각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나왔다. 이어 오전 11시 각료들에게 둘러싸여 회의실을 나온 조스팽 총리는 "각료회의가 어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주 좋았다"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기자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엘리제궁을 떠났다.

참석자들은 "조스팽 총리가 그동안 내각이 이룩한 성과에 대해 각료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했다"고 전했다.

21일 실시된 대선 1차 투표에서 극우파인 장 마리 르펜 국민전선(FN)당수에 밀려 결선 진출이 무산됐다는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지 3시간 만에 조스팽 총리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조스팽 총리는 계보에 이끌리고 부패로 얼룩진 프랑스 정치문화 속에서 합리적인 개혁을 주도하는 신선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정치인으로 평가받아왔다. 집권 후반기에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고 고질적인 실업률을 20여년 만에 9%까지 끌어내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단 열매를 위해 그가 택한 자유주의의 쓴 길은 전통적인 사회당 지지층의 등을 돌리게 만든 부메랑이었다. 대선 유세 당시 방문한 렌시(市)에서는 "좀 더 사회주의자가 돼라"는 경고의 뜻으로 빨간 케첩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우파와 극우파가 합세해 침소봉대한 측면이 없지 않은 치안부재 문제로 선거기간 내내 시달려왔다.결국 그것은 합리적인 정치인 대신 선동적인 대중 정객에게 설 자리를 만들어주는 역효과를 낳았다. 민주주의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지만 조스팽 총리는 좌파의 거목답게 깨끗하게 승복하고 한점 부끄럼 없이 30여년간 몸담아온 정치계를 떠났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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