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엎친데 EU·中 덮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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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과 중국이 자국 철강시장 보호에 나서면서 한국의 철강 수출에 비상이 걸렸다.

국내 업계의 전체 철강 수출에서 EU가 차지하는 비중은 5.1%(물량기준)다. 따라서 EU의 수입규제로 인한 직접 피해액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EU로 나가려던 물량이 막히면서 업체간 가격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회복세를 보이던 철강가격이 또다시 약세로 반전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도 반덤핑 조사 착수=중국이 한국산 등 5개국 냉연강판에 대해 반덤핑 조사를 개시함에 따라 상황이 점점 악화하고 있다. 22일 산업자원부 발표에 따르면 중국측의 이번 조사는 바오산강철 등 3개 중국 철강회사의 제소에 따른 것으로 포스코·동부제강·현대하이스코·유니온스틸·삼성물산 등 국내 5개사에 대해 32.05%의 마진율을 신청했다. 지난해 한국의 대중국 냉연강판 수출액은 3억4천만달러였다.

현재 국내 철강업계의 대(對)중국·동남아 수출비중은 27%, 16.9%로 1,3위를 차지하고 있다. 철강업계는 이번 조치로 인해 아시아시장에서 덤핑 등 출혈경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하고 있다.

국내 업체 가운데 EU에 수출하고 있는 업체는 포스코·동부제강·INI스틸·동양석도강판 등이다. 포스코 경제연구소인 포스리의 한내희 마케팅연구센터장은 "한 쪽이 벽을 높이니 다른 쪽도 벽을 쌓아 철강제품이 오갈 데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H빔 15만t을 EU에 수출한 INI스틸은 "통상마찰을 우려해 수출물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 왔기 때문에 이번 규제로 큰 타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무역규제가 전세계로 번지면서 전반적인 수출 위축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U,대미 보복 의지 강해=미국의 세이프가드에 맞서는 EU의 자세는 무척 강경하다. 미국과 같은 수준의 철강관세 외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보복조치도 마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EU의 보복 리스트에 오렌지주스(플로리다주)·의류직물(캐롤라이나주)·오토바이(위스콘신주) 등이 포함돼 있는데, 이들 제품의 주산지가 모두 지난 대선 때 부시 대통령이 앨 고어 민주당 후보와 접전을 벌인 지역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파스칼 라미 EU 무역담당 집행위원의 말을 인용, 부시가 정치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들 주와 기업들에 타격을 가해 백악관으로 하여금 세이프가드를 철회하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같은 보복조치가 실제로 실행되려면 앞으로 1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여 협상카드라는 분석도 있다.

EU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은 미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유럽은 지난해 미국에 45억달러어치의 철강을 수출했는데, 이는 EU 전체 철강 수출의 28%에 달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철강싸움이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그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차원에서 진행돼온 생산설비 감축 논의는 힘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는 지난달 2010년까지 모두 1억3천만t의 생산설비를 줄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무역전쟁으로 발전함에 따라 더 이상의 협상은 물론 기존의 합의 자체도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김창규·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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