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2>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16) 캉드쉬와 비밀 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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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97년 11월 16일 캉드쉬 IMF 총재와의 '극비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우선 캉드쉬 총재가 다음날 한국을 떠날 때까지 그의 방한은 완벽하게 보안이 유지됐다. 국내외 언론은 물론 각종 보안기관마저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저녁 9시쯤, 강경식 부총리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2시간여 걸린 캉드쉬 총재와의 회담을 끝내고 국회 예결위로 가는 차안에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

"회담은 잘됐소.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끝났어요. 캉드쉬 총재는 우리 구조조정 노력을 아주 높게 평가합디다. 우리가 유동성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IMF가 긴급자금을 공급하고, 구조조정 노력을 지원하겠다는 반응을 보입디다."

姜부총리는 말을 이어갔다."우리의 3백억달러 지원요청에 캉드쉬 총재는 확답은 안했지만 시장 안정에 충분한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했소."

내가 "사실상 우리 요청을 수용한 것 아닙니까"라고 묻자, 姜부총리는 "그렇지요"라고 대답했다.

姜부총리는 캉드쉬 총재가 회담에서 금융개혁법의 국회 통과가 매우 긴요하다는 점, IMF와 차관 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의 때 대통령 당선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 IMF의 금융전문가 두세명을 즉시 파견해 비밀리에 사전준비를 착수하도록 하겠다는 점, 이런 내용 등을 미국과 일본에 별도로 통보해 양국의 지지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점도 밝혔다고 말했다.

캉드쉬 총재는 특히 이런 합의내용 등의 발표방법과 시기는 완전히 한국측에 맡기고, 한국 정부가 발표하면 IMF에서 곧바로 지원 성명을 발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한국정부를 대표한 姜부총리·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와 IMF 최고책임자인 캉드쉬 총재가 한국에 대한 IMF의 긴급자금지원을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이었다.

뒷날 우리나라가 언제 IMF에 갔느냐를 놓고 엄청난 혼선이 있었지만, 1997년 11월 16일이 바로 한국이 IMF에 간 날이다.

남은 것은 실무적인 협의뿐이었고, 그것만 마치면 IMF에서 자금을 지원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姜부총리는 더 자세한 내용은 엄낙용 차관보에게 물어보라고 해 嚴차관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별 차이가 없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 7시30분, 재경원의 진영욱 국제금융과장이 전날밤 캉드쉬 총재와의 회담 결과를 정리한 보고서를 들고 내 사무실로 왔다.

姜부총리는 새벽부터 시작되는 국회 일정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었기에 우선 내가 대신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날밤 회담 결과를 보고하고, 姜부총리가 나중에 상세한 보고를 다시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陳과장이 들고온 보고서 내용은 비교적 간략했고, 전날 저녁 姜부총리에게서 들은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당시 외환사정을 구체적으로 적은 3쪽짜리 '최근 외환수급 동향 및 외환보유고 전망'과, 캉드쉬 총재에게 외환유동성 상황을 설명한 3쪽짜리 영문 자료가 첨부돼있었다.

별첨 국문 자료에 적힌 11월13일 현재 가용외환보유고는 1백76억달러였고, 연말 가용외환보유액 예상규모는 '-4~76억달러'였다.

나중에 이 대목에 대해 들으니, 캉드쉬 총재가 회담에서 첫번째로 던진 질문이 '오늘 현재 가용외환보유액이 얼마인가'였다.

李총재가 1백70억달러 정도라고 대답하자, 캉드쉬 총재는 곧이어 '선물(先物)로 판매한 금액이 얼마인가'라고 물어왔다고 한다. 선물로 판 만큼 앞으로 달러를 내주어야 하므로 그만큼은 외환보유액에서 없는 것으로 쳐야하기 때문에 물은 것이었다.

'연내에 기한이 도래하는 것은 9억달러고, 현재 추세대로라면 연말까지는 보유액으로 꾸려갈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문제'라는 李총재의 답변에 캉드쉬 총재의 표정이 환해졌다고 한다. 사실상 외환보유액이 바닥난 상태에서 IMF 지원을 요청한 태국에 비해 훨씬 여건이 좋은 데 대한 반응이었다.

나는 11월 17일 오전 8시 15분, 캉드쉬 총재와의 회담결과를 金대통령에게 보고했다.

金대통령도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회담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비서실장 보고시간이었고, 당연히 김용태 비서실장이 배석해 보고내용을 들었다. 金대통령은 "잘됐다"고 기뻐했다.

정리=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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