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씨받이 건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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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혹독한 비판으로 기억해둠직한 게 개신교 지도자 강원용 목사의 증언이다. "지난 80년 세월은 '빈들'이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경제 제일주의, 악마에게 절하고라도 권력만 잡자는 권력숭배…"(회고록 『빈들에서』). 그런 근현대를 상징하는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은 어떨까□ "건축과 도시는 한 시대 문명의 증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건물의 90%는 쓰레기에 다름 아니라고 감히 말하겠다."

중진 건축가 김석철의 발언이다. 그 쓰레기들마저 외국의 작품을 베낀 결과라는 건 건축계가 다 아는 비밀이다. "서울은 표절 공화국이자 씨받이 공간이다." 게릴라 비평가로 통하는 조권섭의 독설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럴싸해 보이는 이국풍의 건물이 많은 압구정동부터 훑어보자.

이곳의 표정을 좌우하는 C빌딩.M빌딩 등은 한 건축가에 의해 차례로 복제된 표절 시리즈라는 혐의를 받는다. 잠실 올림픽공원 옆의 한 대형교회. 외벽을 유리로 처리한 이 건물은 영화 '다이하드1'에 나오는 빌딩을 설계한 건축가 필립 존슨의 PPG빌딩을 복제했다.

광화문 근방도 마찬가지다. 대형 서점이 들어선 위압적인 K빌딩의 경우 건축주의 적극적 요구로 복제됐다. 외국 여행 중 찍어온 사진을 디밀며 "이대로 해달라"고 해서 덜컥 올려졌다. 건축의 기본인 공간적 맥락을 무시한 폭력의 탄생이다.

서양건축의 거장 루이스 칸, 르 코르뷔지에, 주세페 테라니에서 해체주의 사조까지 두루두루 잘도 베끼고 씨받이하는 이런 무질서의 상징은 따로 있다.

보신각 맞은편, 관공서 한곳이 세든 대형빌딩. 건물 상단에 뻥 뚫린 구멍까지 있어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K빌딩과 난형난제인 것이 이 참담한 건물이다. 사정이 그렇고 그러하니 건축의 진정한 목표인 자생적 건축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 철학교수 김영민이 우리 인문학의 현단계를 기지촌 학문이라고 규정한 것과 너무도 닮았다. 허탈하다. 김석철이 펴낸 신간 『20세기 건축산책』(생각의 나무)을 훑으며 떠올린 생각 몇 토막이다.

그 책은 건축이야말로 인문학의 정수라고 거듭 주장하던데,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의 고약한 상황이다.건축의 교육구조가 그렇고, 사람들 몰이해가 그렇다. 자 오늘의 키워드를 요약해보자.

'빈들이자 기지촌에 다름 아닌 공간에 세워진 씨받이 표절 건축'. 너무 우악스러운 표현일까? 글쎄다. 우리네 삶의 살풍경에 대한 울림이 큰 메타포로 썩 적절할 듯싶다.

조우석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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