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산업디자이너의 성공담 '12억짜리 냅킨 한 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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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성공한 개인이나 기업의 공통점은 창조적으로 미래를 디자인해간다는 점이다. 다가올 앞날에 대해 설득력있는 청사진을 그리며 과감하게 자신과 기업을 홍보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첨단산업의 메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통하는 산업디자인계의 기린아 김영세(51) 이노디자인(INNODESIGN) 대표의 첫 인상도 그러했다.

크지는 않지만 단단한 체구에, 나이에 비해 젊어보이는 김씨는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아래에서 두 손을 번쩍 들고 여유있게 포즈를 취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창의력 비즈니스(Creative Business) 시대에 개인이든 기업이든 디자이너의 마인드 없인 성공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단언했다.

아직도 디자인의 부가가치에 둔감한 국내 풍토에서 김씨의 주장은 낯설다. 하지만 세계 디자인 강국의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온 그의 말은 기억해둠 직하다.

신간 『12억짜리 냅킨 한 장』은 김씨가 10대 시절 산업디자인과 만난 이래 35년간 걸어온 외길 인생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담은 책이다. 제품전문 디자이너인 김씨가 실제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디자인해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펼쳐나갈지를 보여준다. 그가 성공한 벤처기업가라는 점에서 이 책은 신경영의 지침서로 읽어도 무방하다.

김씨는 "디자인의 형태는 제품의 기능을 따른다" 는 20세기의 '소극적' 디자인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제품의 기능을 새롭고 더 편리하게 만들어내는 것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디자인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그는 21세기형 '공격적 디자이너' 라고 할 수 있다.

독특한 책 제목은, 비행기를 자주 타는 그가 수시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내용 냅킨에 그려놓은 것이 상품화되어 12억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경험담에서 따온 것이다. 디자이너가 왜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메모지를 가지고 다녀보니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고 답했다. 그의 대답처럼 그의 삶은 다소 엉뚱하게 보이는 측면이 많다.

실제로 그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디자인 우선주의' 가 자본주의 경쟁의 상업논리일 수 있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이란 말의 뜻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 이라는 점에서 김씨의 지적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일 것이다. 아이디어는 이데아(Idea), 곧 이상을 추구하는 데서 나온다. 이상과 삶의 변화를 꾀하는 모든 이는 김씨의 말처럼 디자이너다. 다시 말해 국가나 기업의 리더뿐 아니라 한 가정의 가구배치를 다시 해보는 개인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출발점은 세상을 뒤집어보는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신간『12억짜리 냅킨 한 장』의 저자 김영세씨가 밝힌 '디자인 발전 3단계론' 은 한국사회 일반에도 적용함직 하다. 그에 따르면 디자인은 모방단계에서 눈속임 단계를 거쳐 창의력 단계로 나간다.

모방은 눈 딱 감고 베끼는 단계.

법률의 규제를 피해 교묘하게 속이는 단계가 두번째 눈속임 단계다. 김씨는 '창의적 디자인(Creative Design)' 이 현재 디자인 선진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경쟁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창조적 아이디어를 위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의외로 '정직함' 이다. 정직해야만 남의 디자인을 베끼지 않고 독창적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의 대가를 정당하게 주고 받는 의식의 부재가 한국의 디자인 문화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김씨는 꼬집는다.

기업은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또 소비자는 어떤 회사가 다른 회사의 디자인을 흉내내도 말 한마디 않고 그 물건을 사서 쓰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또 김씨는 소비자의 욕구와 기호를 미리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말한 '디자인 우선주의' 다.

소비자와 디자이너 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제조업체 우선' 의 패러다임에서 소비자와 제조업체 사이를 디자이너가 채워주는 '디자이너 우선' 의 패러다임으로 시대가 바뀐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발간되는『DESIGN』의 편집장 마이크 존스가 "김영세씨는 디자인 컨설턴트이자 비즈니스 컨설턴트" 라면서 "앞으로 많은 디자이너가 김씨처럼 모험적인 디자인 투자를 통해 스스로 부를 축적해 나갈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 점이 눈길을 끈다.

배영대 기자

<김영세는 누구인가>

제품전문 디자이너 김영세씨는 알고보면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김씨의 튀는 인생은 고교때부터 시작된다.

경기고 시절인 1960년대 후반 국내 첫 고등학생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여 리드기타와 싱어를 맡았다. 재수를 거쳐 들어간 서울대 미대에서 고교동창인 '아침이슬' 의 작곡자 김민기씨를 만나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라는 통기타 듀엣을 결성한다. 김씨는 이때의 다양한 경험이 그의 디자인인생에서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노는 일에 정신 팔려 대학시절 학점은 무인지경이었던 김씨는 산업디자인 전공과목과 영어에는 강했다. 이어 미국 유학을 떠나 16세때 부터 품어 온 디자이너의 꿈을 펼친다. 학위취득후 산업디자인 명문인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가 되었지만, 2년만에 교수직을 그만두고 실리콘밸리 산업현장에 뛰어들었다.

1991년 여행용 골프가방 '프로텍' 디자인으로 미국의『비즈니스 위크』와 산업디자이너협회가 수여하는 IDEA 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능력을 인정받는다. 93년엔 세 발 달린 가스버너 '랍스터' 디자인으로 IDEA 금상을, 2000년엔 잠금장치가 있는 지퍼 디자인으로 은상을 받았다.

김씨는 현재 이노디자인의 경영에 그치지 않고, 온라인 디자인 컨설팅회사인 DesignAtoZ.com을 개설하여 '사이버 디자이너' 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디자인 우선주의' 를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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