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신좌파 실험] 1. 영국 블레어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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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최근 스위스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을 비롯한 각종 국제행사장에는 세계 시민단체들의 세계화 반대시위가 단골손님처럼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시장의 경제논리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에 대한 전세계적인 저항의 몸짓이다.

이런 점에서 시장의 자유경쟁을 인정하면서 소외계층도 돌보자는 유럽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특히 영국과 독일에선 90년대말 '제3의 길(블레어리즘)' 혹은 '신중도주의(슈뢰더리즘)' 를 표방하는 40대 젊은 지도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정책이념으로 표방하고 나타나 정권을 잡았다.

26일로 취임 1천일을 맞은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정치실험과 공과(功過)를 짚어본다.

1997년 5월 2일. 영국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에 있는 총리관저 앞은 흥분과 감격의 도가니였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당수가 만 44세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젊은 나이에 총리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상 1812년 이후 최연소 총리가 된 블레어는 당시 6백59석의 하원의석 중 4백19석을 차지해 노동당 역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하며 18년간 계속된 보수당정권을 무너뜨렸다.

세계 언론은 앞다퉈 그를 21세기를 이끌어갈 새시대의 정치인으로 주목했고 '블레어 신드롬' 을 만들어냈다.

인기가 워낙 선풍적이라 당시 총선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의 리오넬 조스팽이나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도 본인들을 독일과 프랑스의 블레어로 불러주기를 원할 정도였다.

또 그 덕택인지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좌파가 정권을 잡아 유럽은 좌파 사민주의의 새로운 실험의 장이 됐다.

4년의 세월이 흐른 2001년 1월 말. 총선을 약 석달 앞둔 블레어 정권의 공과(功過)에 대한 영국인들의 평가는 매우 복잡하다.

그동안 블레어가 성취한 일자리 창출, 지방 분권화, 북아일랜드 평화정착 등 정치적 업적들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가 내걸었던 제3의 길과는 거리가 먼 정책도 많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여론조사기관 MORI와 더 타임스는 지난 1월 18일부터 22일까지 블레어 정권에 대한 종합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노동당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50%로 97년 총선 때의 44%보다 높았다. 일단 총점에서는 합격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노동당 지지자들의 소속당 지지율이 97년의 66%에서 52%로 크게 떨어졌고 블레어의 공약 이행여부에 대한 대답에서는 59%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평가해 그에 대한 실망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30년 만에 가장 낮은 5%대의 실업률과 경제안정 등은 유가 인상파동과 측근의 사임 등으로 얼룩졌다.

이 때문인지 블레어의 노동당은 최근 주요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있고 소속당 내 좌파도 이념이 모호하다며 블레어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40대라는 젊음과 '제3의 길' 이라는 이념으로 세계 언론의 화려한 주목을 받았던 블레어는 그동안 '지분참여적 자본주의(stakeholders capitalism)' 와 '일하는 복지(welfare to work)' 라는 두 가지 개념을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해 왔다.

블레어는 또 '좌파' 와 '우파' 라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적인 이분법을 거부하고 정치나 경제체제를 가장 효율적이고 경쟁력있게 만들기 위해 좌.우파의 장점만을 모두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보수당이 추진했던 공기업민영화나 정부조직축소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그러다 보니 이념이 모호하다는 비판이 많다. 좌파에서는 이같은 블레어의 중도좌파 노선은 '변절' 이라고 비난한다.

반면 우파는 '이도 저도 아닌 백화점식 잡동사니 정책' 이라며 그를 '토니 블러' (blur.불투명하다는 뜻)라고 깎아내리고 있다.

블레어는 자신이 내건 '제3의 길' 을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말한다. 자신의 정치실험이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3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블레어는 자신이 추구했던 정치실험에 대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 성패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아직 판단이 어렵다.

유권하 기자

<제3의 길이란…>

경제적인 효율과 사회적 평형을 두 축으로 삼으면서 경제성장과 복지국가를 동시에 유지하며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제3의 길' 은 효율과 형평, 성장과 복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양립의 문제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를 만들기 위한 좌파의 새로운 전략이다.

경쟁지상주의(신자유주의)나 지나친 국가개입주의 모두를 배격하는 새로운 중도좌파의 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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