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애당초 '정치 수사' 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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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구 여권에 대한 안기부 예산 불법 지원 의혹 사건을 수사해 오던 검찰이 갑자기 돈을 받은 정치인 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신승남(愼承男)대검 차장은 "안기부 리스트에 오른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안기부 돈인 줄 몰랐던 것 같다" 면서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이들을 조사하지 않기로 했으며 법적으로 국고 환수도 불가능하다" 고 밝혔다.

이는 한마디로 안기부 예산 사건의 수사 방향을 크게 바꾼다는 의미다.

바로 전날까지도 예산 유용이라며 정치인 조사 방침을 공공연하게 밝혔기 때문에 이같은 방향 선회는 전혀 예상밖의 일이었다.

더구나 검찰의 이같은 방침은 결국 수사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마무리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수사 결과를 기대했던 국민에게 또다시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다.

사실 검찰의 용두사미(龍頭蛇尾)식 사건 처리는 일찍이 예견됐던 일이다. 공소시효가 지난 정치자금 수수 행위를 처음부터 처벌이 가능한 것처럼 몰고간 자체가 사건 부풀리기였다.

나중에 이론이 궁해지자 '장물 취득' 이니 '국고 횡령' 이니 하고 엉뚱한 소리가 나온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수사 진전도 없고 처음과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상황에서 '국기(國基) 문란' 범죄가 어떻게 조사마저 않겠다는 쪽으로 바뀔 수 있는가.

엊그제까지 가능하다던 '국고 환수' 가 하루아침에 법적으로 불가능해지는 법해석을 국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혼란스럽다.

하기야 여당이나 검찰이 국기 문란이라고 주장한 정치적 사건치고 제대로 밝혀진 게 없더니 이번에도 결국 마찬가지가 됐다.

총풍(銃風)사건도, 세풍(稅風)사건도 발생할 때마다 여당에서는 국기를 뒤흔드는 범죄라고 떠들썩했지만 결론은 흐지부지됐었다.

야당 의원들이 국회 내 국가정보원 연락관실 출입문을 뜯고 들어간 사건조차 국기 문란이라고 시끄럽지 않았던가.

검찰의 이같은 방향 선회는 수사 목적의 순수성을 뒤흔든 셈이다. 야당 압박용 정치 수사였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수사 도중 정치인 리스트가 나돌거나 하루 만에 풀어줄 야당 당직자를 새벽 기습체포 작전으로 연행하는 소동을 빚은 것도 결국은 정치적 목적을 노렸다는 분석이다.

특히 리스트에 빠졌던 김종호(金宗鎬)자민련 총재권한대행이나 김윤환(金潤煥)전 의원 등과 현 여권 인사들이 거명되면서 갑자기 검찰이 움츠러들고 있으니 '치고 빠지기' 작전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게 당연하다.

이번 사건으로 검찰에 대한 신뢰는 더욱 땅에 떨어졌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권 독립.개혁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 시대의 가장 화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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