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흰 쌀밥에 고깃국 먹으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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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화인(華人.해내외 중국인 총칭) 3만여명을 대상으로 했던 여론조사에서 중국의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20세기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꼽혔다.

국부 쑨원(孫文)이나 마오쩌둥(毛澤東)주석 등 불세출의 영웅들에 비해 그의 단구 만큼이나 경력과 경륜, 사상의 깊이에서 작게 보였던 鄧을 화인들은 왜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평가한 것일까.

중국 개혁.개방의 현장학습에 전격 나선 북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이에 대한 해답을 풀고 가느냐 여부에 북한의 장래, 나아가 남북한의 내일이 달려있다고 본다.

박정희(朴正熙)전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鄧도 무엇보다 13억 인구의 먹는 문제 하나는 해결했다는 공적을 화인들이 평가한 것이다.

그것이 양국에서 그들의 정치행태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대한 지도자로 떠받드는 원천이다.

鄧의 해결책은 간단했지만 단호했다.

그는 폭풍의 혁명기를 청산, 개혁.개방 노선을 창도하고 실천함으로써 오늘의 번영하는 중국을 개척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는 그의 말에서 보듯 그의 노선은 실용주의가 기반이다.

그는 박정희식 경제개발 경험을 자국 개발의 주요한 모델로 삼아 국가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鄧은 1970년대 말.80년대 초반 좌파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합영법 등 제도적 정비와 함께 선전 등의 특구를 개발했다.

그러나 중국 번영의 상징인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의 오늘은 중국 정부가 외국 및 화교 자본가들에게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까지 십수년의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것을 金위원장은 인식해야 한다.

金위원장이 푸둥의 학습시찰에서 배워야 할 수칙1번이라고 하겠다.

선전 등 4대 특구의 초기투자는 주로 화교자본이 주축이었다.

서방 자본가들도 중국의 거대한 시장성에 매력을 가졌지만 정책의 지속성 및 신뢰성을 검증하기까지 중국진출을 망설였다.

鄧이 정책으로 실천하고 화인자본가들이 투자로 화답하는 '합작형태' 로 그것을 실증했기에 오늘날 외국인의 중국투자 러시를 이끌어냈다는 사실을 金위원장은 직시해야 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북한이 지금까지 바깥 세상에 준 메시지는 ' '우리식 고수' 라는 '폐쇄성과 경직성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진출 기업인들에 따르면 공장을 설비하고 기술을 전수해주려는 기술자의 입국도 말할 수 없이 곤욕을 치른다.

구호물자와 원자재를 싣고간 화물선의 입항이 1개월 이상 허가되지 않고 있다.

신포의 경수로 발전소 건설현장에선 합의된 임금을 무려 다섯배나 올려달라면서 근로자 절반을 돌연 철수시킨 채 6개월 이상 버티고 있다.

각종 교류와 협력사업에 거액을 웃돈으로 요구하고 또 일방적인 문닫기를 예사로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북한이 투자자와 친구를 얻을 수 없다.

더군다나 북한은 중국과 달리 매력적인 시장성도 없다.

결국 북한의 개발은 한국 자본의 진출을 유도하고 그걸 기반으로 외국 자본의 유입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자면 金위원장이 푸둥의 개발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확고한 개혁노선을 수립한 후 남쪽의 신뢰를 얻는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한다.

김대중 정부를 넘어 남녘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열린 대남정책을 수립.집행하는 것이 그의 주요 과제다.

그런 차원에서 金위원장이 연초 당간부들에게 기존관념의 혁파와 신사고를 역설한 후 중국 학습에 나서 중국식 개혁.개방의 추진을 시사하는 듯한 행보는 북한은 물론 우리에게도 매우 고무적이다.

쇼맨십이 강하고 통이 큰 그가 앞으로 펼쳐보일 기존관념의 혁파 및 신사고의 폭과 크기에 비례해 북한의 발전과 한반도의 평화가 영향받을 것이다.

金위원장이 중국식의 개혁.개방에 나선다면 우리도 적극 도와야 한다.

우리도 정권차원이 아닌 국민적 총의를 모은 대북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에 국제관례와 질서에 맞는 제도개혁을 설득하고 교육도 시켜야 한다.

노(No) 해야 할 것은 단호히 노 해야 한다.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라는 김일성(金日成)주석의 생전 소망을 金위원장이 성취하기 위해선 그의 중국 학습이 성과가 있어야 한다.

이수근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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