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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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역문화의 해라고 하면 으레 지역문화를 위한 해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말 그대로 지역문화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고 창조적 대안이 모색될 것이라는 기대를 걸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날 농협이 농민에 의한 것이 아니고 농민에 의해서 운영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역문화의 해 역시 지역문화인에 의해 전개될 가능성이 희박하므로 진정한 지역문화를 위한 해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아직 '지역문화의 해'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도 설정되지 않았고 구체적 계획도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지역문화에 대한 불길한 전망을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문화의 해를 꾸려갈 인적 구성, '지역문화의 해 추진위원' 명단만 보더라도 그러한 예측이 빗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지역문화의 현장에서 지역문화와 함께 뒹굴며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서 직접 몸으로 뛰는 사람들은 대부분 제외됐기 때문이다.

지역문화든 도시문화든 그 문화를 생산하고 전승하며 향유하고 발전시키는 주체는 해당지역의 공동체 성원이며, 그들이 주체가 될 때 문화자치와 문화민주화가 온전하게 이뤄진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문화의 이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가장 긴요한 문화적 과제는 문화자치와 문화민주화를 실현하는 일이다. 지역문화의 해도 이러한 문제인식 위에서 설정된 것이어야 한다.

삶의 진정한 민주화는 정치 민주화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문화 민주화가 더 소중한 것이며, 가장 바람직한 지역자치는 행정자치보다 지역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문화자치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문화의 해는 지역주민들의 문화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주민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기 지역 고유의 문화활동을 독창적으로 벌이면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포착하고 지역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며 지역문화를 잘 가꾸어갈 수 있도록 배려돼야 한다.

그러나 지역문화의 해 추진위원 선정 양상을 볼 때 여전히 같은 식의 문화행사를 지역에서 벌일 가능성이 높다.

서울의 문화기득권자들이나 전국적으로 문화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지역에 내려와서 다양한 문화행사를 벌이는 일이 곧 지역문화의 해를 잘 꾸리는 것으로 착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지역문화의 해는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지역사회에 필요한 적절한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각종 문화활동을 지역에서 벌이는 것은 물론, 지역문화의 정체성이 두드러진 문화나 예술적 전통은 서울과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문화적 독창성을 잃고 있는 도시 주민들을 상대로 다양한 지역문화를 경험하도록 하는 기획이 마련돼야 한다.

지역문화인과 지역문예 단체들은 연대하여 지역문화의 해 만이라도 중앙문화를 거부하고 그들의 지역문화 간섭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서구적 문화제국주의에 감염된 중앙의 문화권력에 대항해 민족적 문화전통의 주체성을 지키려는 지역문화인들의 분발이 어느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객지 사람들이 지역으로 몰려가는 문화 이식이나 문화 구경이 아니라, 지역사람들이 지역에서 시작하고 출발하는 문화 실현과 문화 창출이 바로 진정한 지역문화의 해를 꾸려나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당장 실천에 옮겨야 마땅하다.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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