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분열이 너무도 모질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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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월북 계관시인 오영재는 지난 8월 이산가족상봉단의 서울 방문 당시 어머니 영전에서 "분열이 너무도 모질었습니다" 고 흐느꼈다.

분열의 역사로 점철된 20세기 한국사에서 우리 겨레가 흘린 피눈물이 뚝뚝 묻어난 이 절규의 시 '무정' 은 그래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적시게 했다.

*** 증오 더해가는 지역감정

최근 타계한 겨레의 시인 미당 서정주는 육성의 유언에서 "(이 나라 잘 되려면) 국민 여러분들 모두 화합해 살아가야 합니다" 고 혼신을 다해 토해냈다.

명이 경각에 달린 노시인은 21세기에 들어선 이 사회에 여전히 분열의 위험한 징조가 넘실대는 것을 시인 특유의 직관으로 통찰하고, 국민 화합을 우리에게 권유하고 떠난 것이라고 짐작된다.

최근 우리 사회의 돌아가는 형세는 자꾸만 찢어! 찢어! 쪽으로 선회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치적 지역감정의 문제는 찢어발김의 위험수위에 도달한 느낌이다. 이런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은 단연 사이버 세계다.

제도권 언론의 기능과 영역을 일정 부분 위협하는 대상으로 떠오른 사이버 언론의 토론마당에 뜨는 원색적인 지역감정의 글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내 편이 아니면 저 편이라는 식의 이분법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에 스며든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이르면 절망감마저 느끼게 한다.

완충지역도 찾기 어렵다. 예컨대 얼마 전 폭로된 한나라당의 대선문건에서 언론인을 우호적.적대적 그룹으로 분류해 적대적 집필진에 대해선 비리자료 등을 축적해 활용한다는 언론대책방안의 제시는 이런 분열현상의 전형이나 다름없다.

'실무진의 습작' 이라는 변명과 함께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유감표명으로 이 사태는 소강국면에 들어간 듯하나 이 문건에 나타난 의식의 흐름이 한나라당의 전반적인 기류가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다.

李총재가 위기에 처하면 지지기반인 영남쪽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당직과 전국구에 호남인 푸대접 인사를 했던 행태 등을 보면 李총재인들 지역감정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이 확연해진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이에 못지 않게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金대통령 스스로의 위신을 깎아내리면서 불공정인사 논란을 부추겼던 경찰인사파동은 한 예에 불과하다.

사실 金대통령이 집권하면 지역감정 문제는 다소 묽어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지만 현실은 오히려 더 찢어! 쪽으로 흐르고 있다.

여당의 중진의원이 요즘 지역감정엔 쌍방향으로 '증오' 의 마음이 깔려 있다고 한탄할 정도다.

누가 이 '찢어!' 의 현상을 멈추게 할 수 없을까. 여야 지도자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진솔하게 이해하고 서로의 기반을 껴안는 정치를 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나는 본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바탕이어야 한다.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리는 요인은 여러가지이나 우선 눈에 띄게 거론되는 인사의 공정성 여부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슬기로운 정치를 했으면 한다.

우선 현정권의 '지역편중인사' 를 시비삼는 야당쪽에서 이런 과거를 되새김질하면 어떨가. 예컨대 1972년 10월 유신 이후부터 김영삼(金泳三)정권 말기까지 법무부의 6대 요직(법무장관.검찰총장.서울지검장.법무부 검찰국장.대검 중수부장 및 공안부장)을 거친 1백12명 중 호남출신은 단 2명뿐이었다는 통계에 구여권이었던 야당측도 입이 다물어질 것이다.

*** 새해엔 화합의 큰 정치를

또 집권측도 과거의 '지역편중인사' 를 '지역평준인사' 로 바로 잡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박만 할 것이 아니라 서러움 많던 약자의 시절을 떠올리면서 상대방을 헤아리는 아량을 보인다면 공정인사에 한걸음 다가설 것이다.

그리고 여야는 수의 우위를 확보하려거나 상대방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마구잡이 식으로 '검증되지 않은 혐의의 폭로 그 자체에 매달리려는 삿된 유혹에서 벗어나 국민에게 희망과 신뢰를 심어주는 큰정치로 국민통합을 일구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아우르고 껴안는 여유있는 정치를 한다면 국민은 화합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다. 겨레와 산하를 하나로 묶어내야 할 21세기의 우리 역사는 노시인의 유언대로 남남화합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여야 지도자에게 고언하고 싶다. 金대통령.李총재의 새해 큰정치를 기대한다.

이수근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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