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논쟁 어떻게 돼 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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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낙태 논쟁은 두 가지 관점에서 진행돼 왔다. 여성의 신체 자유와 태아 생명 존중의 충돌이다. 여성의 신체 자유는 1960년대 미국에서 미혼 여성에게 피임법을 가르친 사람에게 벌금을 물릴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시작됐다. 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상황을 크게 바꿔놨다.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을 들어 “낙태는 태아가 스스로 생존이 가능한 시점 이전(통상 임신 28주)까지 할 수 있고, 이를 금지하는 법률은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했다.

여성의 권리와 대립하는 다른 가치는 태아 생명 존중이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순간부터 인간으로 보고 어떤 형태로든 이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가톨릭이 지배적인 나라는 낙태를 엄격히 제한한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는 헌법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가치의 충돌을 해석한 사람이 미국의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이다. 연세대 생명윤리정책연구소 이일학 선임연구원은 “드워킨은 임신 28주를 기준으로 그 전까지는 여성의 자유를, 그 이후는 태아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대법원 판례를 해석했다. 그 전까지는 낙태를 허용해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28주 이후에는 태아를 보호할 만한 가치가 높다고 봤다”고 말했다. 90년대 들어 미국 대법원 판례가 일부 바뀌긴 했지만 여성의 자유와 태아 생명 가치를 저울질하는 기본 틀은 바뀌지 않았다.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는 70~90년 사이에 낙태를 완화하는 쪽으로 법률을 개정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특이하다. 여성의 권리와 태아 존중이라는 대립 구도가 깔려 있긴 하지만 다른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다. 바로 출산율이다. 한국은 96년까지는 산아제한의 주요 수단으로 낙태를 음성적으로 활용했고 2003년 출산장려로 정책이 바뀐 뒤에는 낙태를 저출산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연간 50만 명이 넘던 신생아 수가 49만 명, 48만 명으로 떨어지자 35만 건에 달하는 낙태에 눈을 돌린 것이다.

 신성식 정책사회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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