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해자 태도가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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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관계의 진전과 함께 북한의 과거 도발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도 점차 불거지고 있다.

이미 지난달 과거 우리 체제의 전복을 일삼았던 비전향 장기수를 조건없이 북송하기로 한 정부의 조치와 관련해 과거문제는 제기되기 시작했다.

*** 北 과거만행 시인.사과를

이어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과거 도발행위 등을 규탄하고 金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저지하기 위한 2천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최근 미 국무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할 의사를 밝혔고 이에 대해 그동안 북한 테러의 최대 피해자였던 우리 정부가 환영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논란은 더욱 가열되는 양상이다.

남북화해의 시대를 맞아 북한이 저지른 각종 도발 및 테러행위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물론 북한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테러행위를 인정한 적이 한차례도 없지만 명백한 증인과 증거가 있는 마당에 그런 억지주장으로 사실을 호도할 수는 없다.

북한의 과거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지만 크게 원칙론과 현실론, 또는 정의론과 화해론으로 나누어진다.

원칙론은 북한의 과거 테러행위에 대해 최소한 분명한 시인과 사과는 받고 넘어가야 한다는 시각이다.

아직도 사건의 기억이 생생하고 수백명의 피해 유족들이 있는 마당에 최소한 정의실현을 위해서도 그렇고 남북한간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도 시인과 사과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현실론은 이제 어렵사리 남북화해의 시대가 열린 마당에 민감한 과거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결국 남북관계는 좌초하고 말 것이므로 민족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용서하자는 시각이다.

또 설혹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며 남북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이런 문제들을 다룰 시점이 올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원칙론과 현실론은 모두 나름대로 충분히 일리가 있으며, 과거사 처리문제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과거사 처리와 관련해 두가지 점을 유념해야 한다.

첫째, 과거사는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문제라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만 보더라도 가깝게는 5공 청산에서, 멀리는 일제 청산에 이르기까지 과거사 문제는 가장 민감한 정치.사회 문제였다.

또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 사건에서 보듯이 과거사 처리는 외국에서도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을 정도로 엄청난 정치문제가 되기도 한다.

원칙과 현실, 정의와 화해, 정서와 실용의 요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과거사 처리는 큰 반발과 혼선을 불러올 수 있다.

둘째, 과거사 정리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역시 가해자의 태도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과거를 반성할 경우 과거사 처리는 한결 수월해지지만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으면 과거문제는 현재와 미래의 걸림돌로 남는다.

지난 세기 독일과 일본은 주변국에 유사한 고통을 안겼지만 과거사를 대하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달랐고 그 결과 독일은 유럽에서 신뢰받는 국가로 자리잡은 반면 일본은 여전히 주변국들의 의구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남북 진정한 화해 첫걸음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 남북한간 과거사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민간인 납치, 아웅산 폭탄사건, 대한항공 폭파 등 과거 테러행위에 대해 아직 사과는커녕 시인조차 않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북한에 제기할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최근 북한은 남한사회의 공산화를 목표로 하는 노동당 창건일을 민족의 '명절' 로 칭하면서 남측 단체를 초청했고 우리 정부는 며칠을 전전긍긍하다 '조건부' 로 수용했다.

이런 태도는 남북간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진정한 화해를 모색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북측이 이런 태도를 계속하고 우리측이 이에 끌려가는 한 북의 테러 등 과거행동을 문제삼아야 한다는 남측 내 여론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지난 9일은 아웅산 폭탄테러 17주기가 되는 날이었고 다음달 29일은 대한항공 폭파사건 13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런 날들을 남북한이 부담스러워하고 외면하는 한 남북간 진정한 화해는 요원할 것이다.

백진현 <서울대 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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