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우리는 영원히 주변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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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한은 도무지 서로간에 대화가 안되는 이들이오. 아무래도 우리가 참견해야 불장난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

94년 봄 북한 핵문제로 온나라가 들끓고 있을 당시 도쿄(東京)의 첩보망을 통해 우리 정부에 접수된 미.일 양국 외무장관의 대화내용이다. 다소 과장은 있지만 대충 남북한을 싸잡아 매도하는 투의 얘기였다.

대북협상을 미국이 이끌던 상황에서 어렵사리 성사된 남북회담이 북측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삽시에 파장이 됐던 즈음이었다. 곤혹스러웠던 우리 고위관리들의 분노는 씁쓸함으로 번져갔다.

그런데 모처럼 남북한이 주도했던 정상회담 이후 한국내 사태를 지켜보는 미.일 양국관리들의 심경은 어떨까. 이제 "남북한이 의기투합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라는 정도의 의구심으로 바뀐 것 같다.

이런 반응에는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변화에 자신들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와 초조감이 배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주변 강대국들의 장기놀음에 '말' 노릇 하던 남북한이 스스로의 장래를 설계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두고 볼 일이나 최종평가는 과연 남쪽이나 북쪽이 주어진 기회를 활용할 역량이 있는가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이때 말하는 역량이란 단순히 양측 지도자의 의지와 능력뿐 아니라 체제가 갖는 총체적인 사태관리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민주사회인 남측에선 정치권을 포함한 국민들의 수용자세까지를 포괄한다.

그러나 지난 한달 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혼돈상을 보면 남북관계가 주변국들의 환호와 축복 속에 순조롭게 진척될 것 같지가 않다.

들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남북한 국민성을 거론한 옌볜(延邊)지역 동포 지식인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두쪽의 인민들이 그리도 닮았을까요. 기회만 오면 잘 합쳐질겝니다. "

"하찮은 일 뻥튀기는 과장(誇張)에 능하고, 불같이 달아오르다가도 돌아서면 딴소리고, 배고픈 건 참아도 배아픈 건 못참는 게 남북한이 똑같아요. " 달라진 환경에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동족에게 던지는 냉소가 섞인 고언(苦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북한 모두 이런 구태(舊態)를 탈피 못하면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한반도는 영원히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우리 장래를 냉정하게 헤쳐나갈 역량을 갖췄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외교적 성과라 치부했던 4자회담만 해도 그렇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다분히 김새버렸지만 4자회담은 바깥에서 보기에 걸핏하면 싸움질이던 남북한 손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맡길 수 없다는 우려에서 미국이 밀어붙였던 결과일 따름이다. 그리고 바깥의 이같은 우려는 여전히 살아 있다.

결국 한 차례의 정상회담으로 전략적 여건이 크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적(敵)과의 동침(同寢)' 을 결정하고 살얼음판에 발 한쪽 들여놓았을 뿐이란 것이 바깥의 인식이다.

한동안 도쿄에선 지난 정상회담을 '김정일의, 김정일에 의한, 김정일을 위한 회담' 이라 표현했던 일본 언론인의 보도가 우스갯소리로 회자(膾炙)됐다.

하지만 이에 더해 '남측 대통령은 단임(單任) 임기에 구애받지 않고 법을 바꿔서라도 능히 일 저지를 수 있을 것'이란 빈정거림은 가히 모욕적이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들의 안타까움을 내뱉은 것이라 보면 그만이지만 밑에 깔린 우리에 대한 폄하(貶下)가 못내 앙금을 남긴다.

이래저래 뜨거운 눈물과 솟아오르는 격정이 한동안 한반도를 뒤덮을 것이다. 그리고 주위로부터의 입에 발린 기대는 우리를 계속 달뜨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닥칠 도전의 핵심은(북측은 제쳐두고라도) 우리 체제가 과연 강대국들 이익다툼의 대상인 '주변' 에서 헤어나 '중심' 에 근접할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에 있다. 싫건 좋건 이들의 주요 관심대상에 제발로 뛰어들지 않았던가.

도쿄에서 길정우<중앙일보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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