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일 안 하면 초유 사태 피하지 않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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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24일 오후 서울 등촌동 영구 임대아파트 가정을 방문해 김윤옥 여사가 직접 만든 밑반찬과 쌀을 선물한 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문규 기자]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24일 ‘준(準)예산 카드’를 꺼내들었다. 준예산은 국회가 연말까지 예산안 처리를 못 했을 경우 전 회계연도에 준해 꾸리는 잠정예산이다. 1960년 개헌 때 국회 해산상황에 대비해 이 제도를 도입했으나 실제로는 한 번도 편성돼본 일이 없다. 따라서 대통령이 준예산 집행 준비까지 지시하고 나선 것 자체가 연내에 예산안을 처리해 달라는 강력한 압박인 셈이다.

박선규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비상경제대책회의 직후 이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상세히 전달했다. “연말까지 준예산 집행에 대비한 준비작업을 마쳐라” “내년 1월 1일 임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준예산 집행지침 등을 의결해 부처별로 즉시 집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 등이었다. 모두 ‘국회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사상 초유의 사태도 피하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뚜렷한 발언들이다.

특히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일단 준예산이 집행되면 서민경제에 주름살을 드리울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 이 대통령은 “준예산으로는 법률상 지출 의무가 없는 정책사업은 추진이 불가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변인은 이 언급을 전하면서 “(여기서) 법률상 지출 의무가 없는 사업은 서민과 관련된 예산(사업)이다. (대통령이) 이런 부분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한 청와대 참모는 이와 관련, “청와대로선 ‘서민 경제를 생각해서라도 예산안을 처리해 달라’고 압박해 야당으로 공을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회의에선 “준예산이 집행되면 대통령 훈령 등에 근거해 만들어진 각종 위원회 소속 공무원에겐 임금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이 대통령에게 보고됐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다른 공무원들 간 형평성과 서민과의 고통분담 등을 이유로 들며 “준예산으로 갈 경우에는 공무원들의 봉급 지급도 전체적으로 유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냈다고 전했다. ‘지시’가 아닌 ‘의견’이라는 점을 명시하기는 했지만, 역시 준예산 집행→전체 공무원 임금지급 중단→서민경제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단 전망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의 준예산 준비 지시가 정치적으로는 ‘배수지진(背水之陣)’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정무와 정책라인의 보고를 받으며, 이 대통령은 정말 준예산을 집행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 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유층 지역엔 희망근로 지원 부적절”=이 대통령은 이날 희망근로사업 예산 집행과 관련, “기계적으로 배분하지 말고, 어려운 지역에 더 배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산 여유가 있는 지역에 희망근로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 이 대통령은 청년들의 구직난과 중소기업의 구인난이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에 대해 보고받은 뒤 “인문대, 특히 지방대 나와 취업하지 못한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기술·직업교육을 시켰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글=남궁욱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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