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실사구시… DJ 협상력 돋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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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4일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날이었다" 고 말했다.

2차 정상회담에서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과 4개항에 합의한 뒤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이어 참석한 남북 고위 인사들을 향해 "이제 우리는 출발점에 섰다" 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지난 근대사 1백년은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 규정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전쟁, 남북을 갈라놓은 철책선 등을 거론했다.

이런 발언들은 4개항 합의에 대한 金대통령의 역사적 소감으로 받아들여졌다.

金대통령은 이날 회담을 전후해 유난히 말을 아꼈다. 그만큼 심적 부담을 느꼈다는 얘기다.

金대통령은 회담 전 김정일 위원장이 "(金대통령 방문에)평양 시민들은 대단히 흥분상태에 있다" 고 말하자 "감사하기 한량 없다" 며 미소로 답했다.

그러면서 金위원장에게 발언을 양보하는 모습이었다.'대북정책의 최고전문가' 로 평가받는 金대통령으로선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간단한 코멘트를 하면서 金위원장의 다변(多辯)과 거침없는 유머를 지켜보았다. 서울의 회담 관계자는 이를 '양보의 협상전략' 으로 해석했다.

정부 관계자는 "말수를 줄이는 金대통령의 모습에서 남북문제 돌파에 대한 각오가 느껴졌다" 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2차 회담에서 이산가족.당국자간 대화 문제를 반드시 풀기 위해 구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하지만 金위원장이 먼저 '실향민' 문제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를 보였다.

회담에선 "지금은 영토와 인구가 중시되는 시대가 아니라 지식정보화시대로 우리 민족이 힘을 합치면 세계 일류국가로 살 수 있다" 고 金위원장을 설득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통일은 절대적인 명제" 라고 강조했다. 시대흐름에 맞춰 논리를 제시해 설득하는 DJ 특유의 협상 자세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金대통령은 또 김영남(金永南)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공식면담에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정신을 강조했다. 면담 말미에 "작은 것부터, 쉬운 것부터 하나씩 풀어 나가자" 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회담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서울에 들고 올 구체적 성과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했다.

金대통령은 다른 한편으로 민족단결을 앞세웠다. 북측 입장을 의식한 것이다.

"힘과 마음을 합치면 하늘도 이긴다는 말이 있다. 민족이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13일 밤 만찬사), "한반도 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金위원장의 발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4일 만찬사)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아침에 한광옥(韓光玉)비서실장.임동원(林東源)특보 등 우리측 관계자들에게도 "북측이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우리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야 한다" 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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