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실세 전화 한 통화로 민원이 해결되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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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국민권익위는 최근 보도자료를 통해 이재오 위원장의 ‘현장 민원해결’ 활동을 홍보했다. “위원장은 9월 30일 취임 이후 두 달 동안 112곳의 현장을 방문했다. 현장 방문을 통해 건의 사항과 주민 애로 사항 등 369건을 발굴하여 209건을 현장에서 합의를 중재하거나 처리 방법을 안내하는 등으로 조치를 완료했다. 160건도 제도 개선에 반영하거나 관련 부처와 협의하는 등 후속 조치를 추진 중”이라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현장에서 민원해결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경기도의 지방도로 확장 공사가 거론된다. 이 위원장은 지난 10월 중순 다른 사안으로 지역을 방문했다가 도로건설을 위한 보상이 빨리 집행되도록 해달라는 민원을 들었다. 그는 현장에서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김문수 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의 부탁 때문인지는 몰라도 경기도는 내년도에 15억원의 보상예산을 반영하기로 했다고 한다. 권익위는 “속초비행장 비행안전구역 완화 등 오랜 세월 동안 미해결 상태로 논란만 되풀이되던 5건의 주요 고질 집단민원을 현장방문을 통한 조정회의로 해결하는 성과도 거두었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장의 이런 활동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유은혜 민주당 수석부대변인은 “요즘 이 위원장을 만나는 게 ‘로또 복권’이라는 말이 나온다”며 제도와 절차를 무시한 직권남용이라고 비판했다. 권익위는 최근 부패감시를 위한 계좌추적권을 확보하는 것과 공무원 청렴도 평가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공무원은 5000원짜리 식사를 해야 한다는 위원장의 ‘소신 발언’을 놓고도 “실세라고 권익위원장이 제도에도 없는 군기반장 역할을 하느냐”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현장에서 민원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것은 국가 행정의 중요한 과제다. 실제로 각종 민원이 서류형태로만 사무실 책상에 쌓여 국민의 권익이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많은 경우 관련 부처들이 민원을 서로 떠넘기는 것도 행정의 고질이다. 그런 점에서 권익위가 현장 행정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것은 민원해결의 바람직한 변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위원장과 권익위는 ‘현장 해결’의 부작용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특히 이 위원장은 정권의 실세에다 지역구 보궐선거 출마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더욱 이런 점에 유념해야 한다. 경기도 도로 건만 해도 기본적으로 이는 경기도와 도의회가 예산 배분의 적절성 등을 따져 결정할 문제다. 이 위원장은 전화를 들 게 아니라 권익위 이름으로 정식으로 민원을 경기도에 전하는 형식을 취했어야 한다. 민원해결에 있어서 위로는 대통령부터 아래로는 일선 공무원까지 제도와 절차를 존중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파워를 이용한 ‘예외적 해결’을 추구하면 이는 형평성에 어긋나고 전체적인 민원해결 질서를 해치게 된다. 이 위원장은 의욕만큼이나 절차와 형식이 중요하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