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의 행복한 책읽기] 보드리야르 '예술의 음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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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도 한물간 지금 장 보드리야르에 대한 우리 지식사회의 관심 역시 시들해진 감이 있다.

한때 시뮬라크르니 시뮬라시옹이니 보부르 효과니 내파니 하며 우리 지식인들의 담론에 자주 원용되던 개념들도 현저히 출현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때늦은 마르크시스트' 로 출발한 이 프랑스 사회학자는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 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 만큼이나 그의 주장에 대한 동조의 목소리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더욱이 보드리야르의 주장이 과연 그 선정적이고 화려한 수사에 버금가는 튼튼한 논리적 뒷받침을 수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면 대다수 학자들은 고개를 가로젓는 형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정작 보드리야르 자신은 이런 추세에 전혀 개의지 않는듯한, 아니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어느 정도이냐 하면 때로 그가 일부러 화제가 될만한 극단적인 발언을 골라서 함으로써 주위의 이목을 끌고자 하는 전략을 구사하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 정도이다.

그의 글에 넘쳐나는 과격한 단정과 예언은 이점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보드리야르의 국내 소개에 남다른 노력을 경주해온 배영달 교수의 '예술의 음모' 에도 저자의 이런 취향은 여실히 드러나 있다.

1996년 '리베라시옹' 지에 기고한 표제의 글에서 보드리야르는 별다른 유보 조항 없이 '예술의 종언' 이란 주제로 직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예술은 죽었다.

그런데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 이라고 한다.

20세기 초반 뒤샹이 소변기에 '샘' 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출품한 이래 예술가들은 예술과 일상적 삶 사이의 경계선을 없애는데 한사코 주력해왔다.

그리하여 레디메이드를 거치고 엔디 워홀의 팝아트를 통과한 지금에 이르러 우리 사회는 '과도한 미적 포화 상태' 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대상이 미적 대상이 됨으로써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미적 대상이 되지 않는 역설적 상태에 봉착해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현대 예술은 본질적으로 무가치하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이런 무가치함 저편에 아직도 뭔가 숨겨져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며, 사람들은 이런 환상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함으로써 '예술의 음모' 에 공모자로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음모에는 주모자가 없고 모든 사람들이 희생자인 동시에 공모자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예술의 희극을 계속 상연하고 있을 뿐' 이라거나 '오늘날 예술의 도덕적 규칙은 사라졌고 철저하게 민주적인 놀이 규칙만이 남아 있다' 거나 '현대예술의 모든 움직임 이면에는 일종의 무기력, 즉 더 이상 스스로 초월하지 못하여 점점 더 빠른 순화 속에서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 있다' 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보드리야르의 논의에서 니힐리즘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는 단지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처해있는 운명에 대해 극단적인 가설 하나를 제시했을 뿐이다.

그것에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책을 읽는 각각의 독자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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