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 들른 법정 스님 '가을 법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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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은 그만 마치고 남은 이야기는 나무에게 듣기 바랍니다. 여백이 풍부한 법정 스님의 가을 법문은 행복학 강의가 뼈대를 이뤘다.[박종근 기자]

"여러분, 여름 시원하게 지내셨어요? 엄청난 더위네 뭐네 신문 방송들이 요란을 떨었지만, 실은 별 대단한 거 아닙니다. 우리 남은 인생에서 이런 여름 몇 번 더 만날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 마침 오늘이 하안거(夏安居.여름철 공부) 해제 날이기도 하니 무엇이 행복인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길인가를 함께 공부해볼까 합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무소유'의 저자 법정(72) 스님이 가을바람과 함께 대중의 곁에 잠시 돌아왔다. 갖고 있던 직책(회주)마저 훌훌 털고 산으로 돌아갔던 그가 들려준 하안거 해제 법문(法門)에서는 경전.부처님 얘기가 거의 없었다. 절 앞마당을 메운 불자들을 포함해 누구나 목말라하는 행복이 뜻밖의 법문 주제였다. 스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만든 모임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인 길상사다운 풍경이기도 했다.

입을 연 스님의 행복학 강의는 프랑스의 한 정신과 의사의 여행 스토리. 도회지 삶에 염증을 느껴 진료실 간판마저 내리고 중국의 한 고승을 찾아 떠났던 의사의 삶이 법문의 뼈대였다. 선재동자가 천하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주유했듯이 행복이란 것에 대한 고승의 말씀을 목말라했던 것이다.

"그는 호젓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그래, 행복은 이렇게 산길을 걷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어렵게 만난 고승의 첫마디가 이랬습니다. '나름의 마음공부를 다 마친 뒤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눠보자.' 힘을 얻은 의사는 그때그때 깨우친 나름의 행복학 정의를 수첩에 빼곡하게 적어둡니다."

이를테면 그가 보기에 무엇보다 행복이란 남과 비교를 하지 않는데서 온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내 집 한 칸 갖고 거기에서 채소밭을 가는 소박한 삶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 등의 깨침도 두루 얻었다. 여행을 마친 뒤 고승에게 수첩을 내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고승이 함께 산길 걷기를 권유한 것도 그 때였다.

"고승은 말합니다. '당신의 행복 정의는 모두가 훌륭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알기에 진정한 행복이란 멋 훗날 그 어떤 거대한 목표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내가 숨쉬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의 요체입니다.' 어때요. 좋지요? 제가 최근 읽은 신간 '꾸뻬씨의 행복여행'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두루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길상사 위 행지실을 찾아 가뿐한 발걸음을 내딛는 법정스님을 바라보는 신자들은 지난 6월 하안거 시작 때 스님의 법문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 가장 위대한 종교는 불교도, 기독교도 아닌 바로 '친절이라는 종교'입니다." 그 메시지는 전국의 선원에서 수행자 3천명이 화두 공부에 들어갈 때, 일반 불자들에게 던져진 화두였다. 그렇다면 이날 '행복 화두'는 어수선해진 세상에서 부대끼며 사는 재가(在家)불자를 헤아린 것일지도 모른다.

"법정 스님은 법문 때 책 이야기를 자주 전해준다. 그래서 읽어본 책도 꽤 된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도 그 중 하나인데, 책 속의 미국 자연주의자들의 삶과 죽음은 그 어떤 선사(禪師)들 못지 않다." 마침 이 절을 찾은 운문사의 비구니 일진 스님의 말이다. 기억해둘 게 또 있다. "내 말은 이만 마치고 남은 이야기는 지금 눈부시게 피어나고 있는 나무한테 듣기 바랍니다." 그게 법정 스님이 항용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행복이란 화두를 새겨보는 것은 각자의 삶의 몫일까?

조우석 기자<wowow@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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