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북한을 움직이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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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성공은 백명의 아버지를 낳는다 (서양속담) .어떤 일의 결과가 좋으면 많은 사람이 그건 '내 덕' 이라고 주장한다.

잠정적으로나마 미사일 위기가 해결되니까 그 합의의 바탕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제공했다는 반응이 재빨리 나왔다.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94년의 핵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미사일 협상은 북한과 미국의 몫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대북정책이 햇볕 아닌 바람이었다면 북한이 미국만 믿고 벼랑 끝에서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해상도발과 차관급 회담 결렬, 금강산 관광객 억류,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같은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인내심을 갖고 북한의 태도변화를 기다렸다.

보수여론에 밀려 햇볕정책을 포기했다면 미사일 협상의 결과도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사일 위기의 종식을 서해 연평해전에 결부시키는 것은 너무 가볍고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적인 자화자찬이다.

북한의 대미관계 개선 의지와 대외전략이 서해사태 정도로 흔들릴 만큼 뿌리가 약하다고 보는가.

북한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미사일 포기의 대가를 흥정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발칸전쟁이다.

코소보 사태의 발생과 함께 클린턴의 관심의 초점은 한반도를 떠났고, 세르비아 공습이 결정되면서 동북아시아를 지키는 미 해군 제7함대 주력함정과 전폭기의 대부분이 페르시아만과 아드리아해로 이동했다.

미군의 전진배치에 관한 한 동북아시아에는 군사력의 공동현상이 일어났다.

북한이 특히 무서워하는 것은 미국 미주리주에 사령부를 둔 제509 폭격항공단의 B - 2폭격기다.

이 항공단은 세계2차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 (廣島) 와 나가사키 (長崎)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부대다.

지난해 9월초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한 직후 B - 2폭격기들이 괌으로 출동해 북한에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B - 2폭격기는 전파를 반사하지 않는 스텔스형이어서 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고 심야에 초고공에서 지상의 목표물을 파괴한다.

특히 지난해의 경우 지하요새의 폭격을 위해 개발된 심부돌입형 (深部突入型) 폭탄 투하를 집중적으로 훈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훈련계획이 취소됐다.

B - 2폭격기를 발칸반도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코소보 사태로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의 발칸작전은 끝났다.

북한은 동북아시아에 생긴 미국 군사력의 약화를 믿고 계속 벼랑 끝에 머물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미사일 위기 해결에 북한의 군사적인 고려가 있었다면 그것은 연평해전의 패배가 아니라 극동 미군의 공격능력 회복일 것이다.

동시에 미국도 가능한 한 최대의 당근을 제시했다.

북한을 움직이는 것은 이렇게 당근 못지 않게 미국이 갖추고 있는 북한내 목표물 공격의 능력이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클린턴 정부의 확실한 입장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북한정책과 전략은 적당한 양의 당근과 군사적인 억지력으로 북한의 전쟁도발과 대규모 테러행위만 방지하면 북한은 저절로 붕괴된다는 것을 전제했다.

그러나 이번 미사일 합의로 미국이 북한을 정상적인 나라로 상대하고, 연락사무소 설치를 거쳐 관계정상화까지 가는 포괄적인 해결방안을 페리보고서를 통해 밝힌다면 그것은 미국의 북한정책 기조가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는데서 북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쪽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는 것이다.

베를린 합의는 북.미관계를 개선하고, 그 연장선에서 한반도 주변의 긴장을 완화하는 긴 여정 (旅程) 의 출발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런 큰 틀을 배경으로 대북정책을 점검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金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에 남북관계 개선의 진전에 상관말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촉구해 왔다.

북한의 변화유도가 햇볕정책의 기본목표라면 그 목표에 가장 효과적인 북.미, 북.일관계 개선과 남북관계를 분리하는 것은 가치있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미사일 위기의 해결은 큰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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