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 “어느 부처 장단에 춤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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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외국계 제약회사 영업사원인 김재한(가명)씨는 지난달 하순 자신이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보낼 추석 선물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같은 일을 두 번 해야 했다. 한 병에 9만원 하는 와인을 샀다가 부랴부랴 반품하고 4만5000원짜리로 바꾼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 공정거래규약의 명절 금품 제공 상한 기준은 5만원인 데 비해 보건복지가족부가 7월 제약업계와 머리를 맞대 만든 자율협약은 10만원으로 합의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9만원짜리 와인 선물은 자율협약으론 리베이트가 아니지만 공정경쟁규약으론 리베이트로 간주돼 과징금을 물 수 있다. 복지부는 지난달 15일 공정위와 리베이트 협약 단일화를 시도했지만 이견으로 무산됐다.

리베이트를 둘러싼 이런 해프닝은 제약·바이오 업계가 근래 겪는 혼란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업종에 대한 기본 인식과 정책 방향이 관련 부처마다 제각각이어서 업계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교육과학기술부·지식경제부는 바이오기술(BT) 산업 육성 정책을 펴는 데 비해 관할 당국인 복지부는 그보다 약값 인하에 주력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등은 2007년부터 ‘신성장동력 스마트 프로젝트’ 안에 BT 육성계획을 추가해 차세대 글로벌 바이오 제품을 탄생시키기 위한 지원을 시작했다. 올 들어 7월 지식경제부가 발표한 ‘바이오스타 프로젝트’에 따르면 바이오산업 투자 활성화와 스타기업 육성을 위한 펀드를 조성해 기술개발의 상업화 단계를 집중 지원하기로 했다. ‘바이오메디컬 신성장동력펀드’가 그것이다. 민·관이 공동 출자해 연말까지 1000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복지부는 7월 ‘의약품 가격과 유통의 선진화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해 특허만료 신약과 제네릭(특허가 끝난 오리지널 신약의 복제약) 의약품의 약값 인하를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추진 속도가 워낙 빨라 오리지널 신약의 가격을 우선 5~10% 일괄 인하하고, 제네릭이 시판되면 40%까지 추가로 깎는다는 소문이 흘러나온다. 이런 내용이 현실화하면 수익성이 떨어져 제약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여력이 줄어든다는 것이 제약업계의 항변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윤희숙 연구위원은 “대박 제품이 나올 수 있도록 제약사들을 R&D로 유인하는 약값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5일 시작된 복지부 국정감사에서도 약값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박근혜 의원(한나라당)은 “현행 약값 제도는 약값을 낮추는 데 실패하고, 제약업계는 신약개발 대신 복제 약 생산에 치중하고 있다. 제대로 작동되는 약값 제도를 수립하려면 먼저 거래를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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