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BK21 사업 전면 철회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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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교육부의 이른바 'BK21' (두뇌한국 21) 사업계획을 두고 대학사회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반발에 직면한 교육부는 최근 이 사업을 수정보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나는 기초사회과학분야 교수로서 이 사업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학문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따라서 수정보완이 아니라 전면폐기가 마땅하다고 본다.

이 사업계획의 골간은 교육부가 몇가지 연구과제를 미리 정해주고, 여러 학과를 망라해 수십명의 교수로 구성된 '사업팀' 이 여기에 응모하도록 설계돼 있다.

참여교수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과제 수행 실적을 교육부에 보고하고 심사.평가.감독을 받도록 돼 있다.

선정된 교수팀과 그 지도학생들에게는 연구지원이 집중되고, 비참여교수들과 그 학생들은 직간접의 상대적 손해를 감수하도록 짜여져 있다.

이러한 계획은 대학을 자율적인 학문주체로서가 아니라 교육부의 수직적 하청기업으로 편입시켜 '관리' 하겠다는 동기를 근본에 깔고 있다고 보인다.

관리목표와 관리방식을 미리 정해놓고 대학을 관리대상으로 삼아 집중 감독하는 일종의 '목표경영체계' (management by objectives)에 기초해 대학을 운용하겠다는 정책기조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학문정책의 폐단은 첫째, 학문연구의 극단적 획일화로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교수들이 각자 탐구해오던 기존의 전공 연구영역을 모두 버리고, 한개 또는 수개학과의 교수 전체가 교육부가 정해준 연구주제에 집단적으로 모여들거나 아니면 고사되는 두가지 중 어느 하나를 택하도록 강제하는 정책이 BK21사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정치철학' 전공교수가 억지로 '사회발전' 으로 연구주제를 바꿔야만 하는 놀랍고 서글프고 굴욕적인 일이 일어나게 됐다.

둘째, BK21은 '학문' 을 '사업' 으로 혼동하고 있다.

이제부터 '대학' 은 '기업' 으로, '학문' 은 '사업' 으로, '교수' 는 '사업팀장' 이나 '사업조장' 으로 바뀌게 됐다.

팀장은 종합관리를 맡고 조장은 현장 실무를 감독하는 경영체제로 대학이 바뀌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 길만이 대학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방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바로 BK21이 명목적으로 표방하는 가치, 즉 21세기 지식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창의적인 고급두뇌의 양성과 학문발전 그 자체의 실현을 오히려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본질적으로 '학문' 이 '사업' 일 수도 없으며 '대학' 이 '공장' 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제발 당국과 사회에 바란다.

'대학' 을 스위치만 누르면 돌아가는 '기계' 가 모인 '공장' 이 아니라, 갖가지의 '나무' 가 모여 있는 '숲' 으로 봐달라. 기계는 전원만 켜면 정해진 방식에 따라 자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돌아가고 제품을 생산한다.

그것을 움직이는 동력과 평가기준은 밖으로부터 주어진다.

반대로 나무는 모든 방향으로 끝간 데 없이 자유로이 자라난다.

커가는 방식도, 힘도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생명력에 일차적으로 의존한다.

BK21이 목표로 삼는 '창의력' 은 대학을 기계로서가 아니라 나무로 대할 때에야 길러질 수 있다.

기업은 '기계정신' 에 기초한 '엔지니어링' 이 필요한 반면 학문은 '섬세정신' 에 따른 '보살핌' 이 필요한 영역이다.

대학은 즉흥적으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매뉴얼' 을 제작하는 곳이 아니라, 비록 당장 눈앞의 이익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고전' 을 낳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학문발전을 위해서는 '돈' 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자유' 가 먼저다.

셋째, 이 계획이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대학원 교육의 질을 반드시 높일지도 의문이다.

이대로라면 대학원생들은 돈을 받는 대신 참여교수들의 프로젝트 노예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다양하고 자유롭고 학문영역에 대한 폭넓고 주체적인 탐험이 필요한 대학원생들이 특정주제에 국한된 좁은 관심에 얽매이게 될 우려가 높다.

이 점에서도 BK21은 고도로 분화되고 끝없이 열려있는 현대의 학문세계에 대한 몰이해를 깔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넷째, BK21에 깔린 철저한 관료주도형 관리감독 방식의 학문정책은 선진국의 학문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학문의 자유를 이처럼 위축시킨 일은 과거 군사독재시절에도 없었고, 일제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정부가 연구주제를 정해놓고 이를 강제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서 학문주체인 교수들에 대한 모독이며 월권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학문은 돈이 없어 어려웠다.

그러나 교육부방식대로라면 이젠 돈으로 망할 역설적 위기에 처해 있다.

BK21계획을 전면 철회해주기 바란다.

대신 그 돈을 교수증원과 학문 인프라 구축에 투입해주기 바란다.

박승관 서울대 교수 언론정보학

◇ 필자 약력 : ▶43세 ▶전북대 신문학과 ▶서울대 신문학 석사 ▶미 스탠퍼드대 신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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