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4.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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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9장 갯벌

출국장 모퉁이에서 손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조말자 여사에게 허리춤이 잡혀 꼼짝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씨는 딴청피우기에 이골난 노름꾼 특유의 유들유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에 해결을 내맡긴 사람으로서의 표정이었다. 손씨를 보는 순간, 주먹이 목구멍 속에서 튀어나올 만치 흥분되었다.

그러나 격한 감정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손씨에게 다가가며 귓속말로 물었다. 귓속말로 물어야 할 내막이 아니었다면, 장마당에 방불한 출국장에서 손씨를 멱살잡이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도박판에서 딴 돈이 모두 얼맙니껴?" "끌려 다니느라고 계산도 못해 봤어. " "계산이고 좆이고 조여사 모가치 (몫) 는 두말 말고 퍼뜩 (빨리) 돌려 조뿌소. 형님이 시방 철모르는 코 흘리갭니껴? 어짤라고 중국까지 와서 노름판 판돈가지고 이런 챙피시런 꼴을 보이고 있는 깁니껴. 집에서 새는 쪽박이 들에서도 샌다카는 본때를 한번 보여 주겠다 그겁니껴? 가당찮은 고집 피우지 말고 퍼뜩 돌려주소. 우리가 중국에 보따리 장사하러 왔지. 노름판에서 돈 따러 온게 아이잖습니껴?"

"중국 땅에 와서 창피를 보이다니? 그런 해괴망측한 말은 하들 말어. 그건 엄연히 공해상에서 벌어졌던 일이야. 한국이든 중국이든 정부의 공권력 밖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창피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없는 일이야. 동서는 아직 원칙을 몰라서 그런 말 하는지 모르지만, 노름판에서 거래된 돈일수록 임자가 엄연하다는 걸 몰라?"

"날보고 동서라꼬 불러주이 눈물이 찔끔 날라카네요. 날 동서로 생각하그던 그 돈 미련없이 퍼뜩 돌려주소. 앞날이 창창한 형님이 뭔 할짓이 없어서 육십 늙은이 돈을 따먹어요? 그 돈 안 내주고 버티고 있으면 형님뿐만 아이고 우리 모두가 발이 묶여 여기서 꼼짝 못하게 된다카는 걸 몰라서 그래요? 눈은 왜 자꾸 깜짝거려요?"

눈만 깜빡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손씨는 처음부터 봉환의 허리춤을 잡아끌었지만, 봉환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손씨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손씨가 목청을 낮추었다.

"동서 가만 좀 있어봐. 나도 생각이 있다니까 그러네…. " "생각은 무신 생각이 있다고 그래요? 태호하고 내하고 완전히 허수애비 만들 생각이라 말입니껴? 형님이 난생 처음 중국으로 장삿길 나선 것은 이런 꼬라지를 보일락꼬 작정한 때문이라요? 하룻밤을 못 참아서 도박판에 끼어든다 말입니껴? 도저히 못참겠으면 한국 돌아가는 길로 작두 가지고 손이라도 짤라뿌소. "

"동서가 그렇게 심한 말까지 할 줄 몰랐네? 나도 생각이 있다니까 왜 그래?" 생각을 가졌다는 손씨의 말은 공연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의중을 꿰뚫어보면, 봉환이든 태호든 그처럼 진작 나타나서 개입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조말자 여사에게 딴 판돈을 돌려줄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행끼리 입씨름이 벌어지고 드잡이가 벌어지는 북새통을 조여사가 목격해야만 돈을 돌려줄 수 있는 명분을 얻어낼 수 있었고, 손씨편으로 보아서는 잃어버린 전액을 돌려 받으려는 과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봉환의 입가에 게거품이 삐죽삐죽 기어나오는 찰나에 바랐던 대로 조여사가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결과는 백만원만 돌려주는 것으로 담판이 되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봉환이었다.

손씨가 딴 판돈 전액을 돌려줘야 한다고 삿대질하며 손씨를 압박하고 들었다. 그로써 조여사와 손씨로부터 시작된 싸움은 자연스럽게 봉환과 손씨의 아귀다툼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여사에게도 수확은 있었다. 봉환이란 사내가 억센 사투리는 쓰고 있었지만, 올곧은 양심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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