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외눈박이 대북 접근’ 벗어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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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북한을 제재하겠다니 전쟁하자는 것이냐.”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대북(對北) 정책을 상징하는 주장이다. 북방한계선(NLL)에서의 기습공격, 핵실험 등 북한의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한·미나 유엔이 북한에 제재를 가하려고 하면 정권 핵심들이 들고 나온 고정메뉴였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최근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움직임에 적용하면 상당히 혼란스럽다. 한·미가 1년 가까이 북한을 무시하고, 제재했는데도 아무런 사단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전쟁’은커녕 딱총 소리 한 번 나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미국이 압력의 고삐를 조여나가도 북한은 반발은커녕 억류됐던 미국 여기자들을 석방하는 유연한 조치를 취했다.

그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을 하면서 육·해·공으로 섬뜩한 협박을 했던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입장을 바꿨다.

물론 북한을 쓸데없이 자극할 필요는 없다. 가령 “개성공단에 기숙사가 들어서면 노조를 만들 우려가 있다”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개성공단 확대는 어렵다”는 발언들은 남측의 고위당국자들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실현성도, 실익도 거의 없으면서 공연히 북한의 자존심만 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북한의 신경을 건드리기만 하면 마치 남북관계가 ‘포연의 불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은 순진하고 단세포적인 도그마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평화’였지만 실상은 ‘평화를 가장한 굴욕’이다. 세계경제 10위권인 대한민국의 국민 중 어느 누가 이를 수긍하겠는가. 결국 이런 주장은 남남갈등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남북관계 진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악성 바이러스’일 뿐이다.

북한이 대남관계를 유연함의 틀로 전환시켰지만 그 속내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번 북한의 태도전환으로 ‘대북제재=전쟁’이라는 등식의 근거가 무너진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일반 국민들의 눈에 비추어 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아직 ‘외눈박이 대북 인식’을 고집하는 계층이 있다. ‘북한이 위협을 가하면 남측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고, ‘북한이 유연하게 나오면 북한 지도층의 결단’이라는 식이라면, 우리 내부 대북 인식의 차이를 어떻게 좁혀나갈 수 있겠는가. 북한의 잘못에 대해 한목소리를 내준다면 효과가 더 커질 텐데 말이다.

정부도 더욱 고민해야 한다. 그동안 북한의 위협과 사회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변화를 일관되게 요구한 자세는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안주하거나 자만해선 안 된다. 우선 당국자들의 발언이 보다 절제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 “북한의 변화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전술적”이라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의 발언은 틀린 분석은 아니다. 그러나 학자라면 몰라도, 대북정책을 총괄하는 통일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언급할 사안은 아니었다. 정부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낼 필요가 어디에 있나.

북한 문제에 선제적으로 개입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북측이 도전을 하면 남측이 응전하는 게 남북관계의 정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상황을 역전시켜야 한다. ‘경제가 엉망이니까 내버려두면 북한이 아쉬운 소리 하겠지’ 하는 식의 ‘단선적·방임형 노선’은 지양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이 대통령이 주재했던 외교안보자문단 모임이 주목된다. “미·중이 한반도에 역량을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국이 북한 문제를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등 현 정부의 노선과는 다른 목소리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부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진정성 있는 관심을 보이면서, 대북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측과의 소통을 보다 강화한다면 남남갈등은 상당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안희창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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